고봉화상선요(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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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화상 선요』(高峯和尙禪要)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승려 고봉(高峰)의 법문집.

고봉[1238~1295]은 중국 소주(蘇州) 출생으로 속성은 서(徐), 이름은 원묘(原妙)이다. 스스로 고봉이라고 불렀다. 15세에 밀인사에서 출가해 16세 때 구족계를 받고, 18세에 천태 교학을 공부했다. 20세 때 선을 배우기 위해 항주(杭州)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간 고봉은 단교 화상 밑에서 ‘3년 안에 깨닫지 못하면 죽겠다’는 각오로 수행하였다.

3년 기한은 다가왔지만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매던 고봉은 1260년 북간탑에 있던 설암조흠 선사를 찾아가 깨달음을 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1271년 임안 용수사에서 잠자던 도반이 떨어뜨린 목침 소리를 듣고 활연(豁然) 대오(大悟)하였다. 1279년 남송이 멸망하면서 고봉은 천목산 서봉 사자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고봉은 사관(死關)을 세운 뒤 산문 출입을 삼가고 정진에만 몰두하였다. 사관에서 15년간 수행하다가 1295년 12월 세수 58세 법랍(法臘) 43세로 입적하였다.

『고봉 화상 선요(高峯和尙禪要)』는 제자인 영중(永中)과 홍교조(洪喬祖)가 고봉 선사의 어록에서 요점만을 추려서 수행자들의 공부에 도움을 주고자 편찬하였다. 우리나라에 『고봉 화상 선요』가 전래된 때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간본으로 1399년(정종 1) 지리산 덕기사본(德奇寺本)이 가장 앞선 것으로 볼 때, 여말선초로 추정된다.

부산광역시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4종의 목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은 1573년(선조 6)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월정사(月精寺)에서 판각된 목판본으로, 1책으로 된 선장본(線裝本)이다. 크기는 24.5×16.1㎝이며, 반곽(半郭)은 19.0×12.5㎝이다. 사주 단변(四周單邊)으로 계선(界線)이 있으며, 행자 수는 8행 18자이다.

총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권에는 참학 문인들이 엮은 호주쌍계암법어(湖州雙髻庵法語)·항주서천목산사자선사법어(杭州西天目山師子禪寺法語) 등 수편의 법어가 실려 있고, 하권에는 염고(拈古)·송고(頌古)·법어(法語)·보유(補遺)·게송(偈頌)이 있으며 권말(卷末)에 행장(行狀) 2종과 탑명(塔銘)이 실려 있다.

원묘는 『고봉 화상 선요』에서 화두(話頭)를 참구(懺咎)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필요한 요소나 경계해야 될 사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 화두참구에 필요한 대신심(大信心)·대의정(大疑情)[의심]·대분지(大憤志)의 3요소, 화두참구 과정에 만나는 각종 병통, 향상사(向上事) 등에 대한 가르침이 그것이다.

『고봉 화상 선요』는 고려 말 이후 조선 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 초기의 벽송당(碧松堂) 지엄(智嚴)[1464~1534]이 이 책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휴정(休靜)의 4세 법손인 설제(雪霽)가 강원(講院)의 중등 과정인 사집과(四集科)에 편입시킨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계종 강원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주석서로는 연담(蓮潭) 유일(有一)의 『선요사기(禪要私記)』 1권, 백파(白坡) 긍선(亘璇)의 『선요기(禪要記)』 1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