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희(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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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희(徐廷禧) 항일 농민운동 지도자.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 제헌국회 국회법제정 기초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농민운동가. 본관은 대구 서씨. 자는 성전(聖傳),호는 농천(農泉) 또는 묵재(默齋)이다.

6선 국회의원 서범석(徐範錫)이 그의 장남이다.

1876년(고종 13) 10월 10일 한성부 서부(현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만리동)에서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아버지 서병갑(徐丙甲)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1907년을 전후해 한성부 중서 정선방 농포계 농포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권농동)에 거주했으며, 1933년에는 경기도 경성부 관철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에 거주했다.

그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서문중(徐文重)의 9대손으로, 증조부 서병순(徐秉淳)은 서문중의 6대 종손으로 선산도호부사(종3품)를 지냈다. 아버지 서병갑은 1874년(고종 11) 정시(庭試) 무과에 급제하여 1876년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에 제수되었던 무관이었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894년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으며, 1896년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다. 1897년(고종 34) 10월 10일 무안우체사(務安郵遞司) 주사에 임용되었고, 1900년 8월 17일 광주우체사 주사로 전보되었다가 1904년 7월 17일 해임되었다. 1905년에는 모종의 이유로 징계를 기다리다가 4월 9일 사면되었다.


8세 때부터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인 1894년 3월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896년 6월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1900년 8월 전라남도 광주 우체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 1월 나철, 정인식 등 33명과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계획하였다.같은 해 광주에서 대한협회 광주지회를 조직하였으며, 동시에 의병운동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1907년 2월 권중현(權重顯)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진도(珍島)에 5년간 유배되는 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광주에 머물면서 1913년 10월 사립광주법학강습소 창립에 참여해 교수가 되었다.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뒤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15년 2월 가산을 정리,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3년간의 만주 생활을 마치고 1918년 광주로 돌아와 생활하면서 북문안교회에 다녔다. 1919년 3월 광주에서 반일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이 때 일반 시민의 동원을 담당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년이 감형되어 석방되었다.1920년 10월 출옥한 후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에 참여, 1921년 6월 광주지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22년 3월 광주노동공제회 안에 설치된 소비조합 창립위원이 되었고, 노동자합숙소를 만들어 노동자의 복지 향상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923년 4월에는 광주소작인연합회 결성에 참여한 뒤 1925년까지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1924년 1월 진주에서 열린 경남노농운동자간친회에 참여하고, 3월 전라노농연맹, 남선노농동맹 결성을 주도하였다. 4월 조선노농총동맹이 창립되자 중앙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이 무렵 북풍파 공산주의 비밀결사인 ‘까엔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6월 언론집회압박탄핵회 결성식에서 임시의장을 맡고, 언론집회 탄압에 대한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이 탄핵대회 때문에 한때 일제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9월 조선기근구제회 조직에 적극 가담하고 서무부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1월에는 서울에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풍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12월 북풍회가 일본 사회운동가들에게 보낸, 조선과 일본 무산계급의 연락과 제휴를 더욱 유기적으로 완전히 하자는 내용의 선전문에 집행위원 12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1925년 7월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대홍수가 발생하자 직접 구조 및 구제활동에 나서는 한편, 조선기근구제회 중앙부 위원을 담당하였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1월 당내 북풍회에 가담하여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정권(停權) 처분을 받았다. 12월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1926년 6월 보석으로 풀려났다.이후 사회활동을 금지당했으나, 그 해 11월 조선노농총동맹 상무집행위원으로 다시 선출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에게서 보석 취소협박을 받기도 하였다.

1927년 11월 조선공산당사건 관계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1928년 2월 무죄를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이 때 오랜 감옥생활과 연로한 나이로 인해 위장병이 심해지자 면회 온 친구에게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출옥 이후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30년 11월 신간회 전체대회대행중앙집행위원회에서 김병로(金炳魯) 체제의 중앙상무집행위원 및 조직부장에 선정되었다.이후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되자 해소론에 반대하였다. 서정희는 오류는 사회주의자가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한 것에 있으며, 한번 참여한 이상 신간회 내부 조직을 더 충실히 하고 각 부문으로 나아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1년 11월 만주동포문제협의회의 위문사(慰問使)로 만주 각지의 14개 피난동포 수용소를 방문, 국내 동포의 위문품을 전달하는 등 약 한 달 정도 활동한 뒤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민중의 구제사업에 많은 관심을 갖는 한편 조선인의 만주 이민을 적극 장려하였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중앙감찰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한국민주당에서 주최한 신탁통치반대 전국대회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3월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 1947년 4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지도위원, 같은 해 6월 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본부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한국민주당의 핵심 간부로 떠올랐다.

1948년 5·10선거에서 한국민주당 공천을 받아 고향인 경기도 포천군에서 출마,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해 6월 제헌국회에서 국회법 제정 기초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7월 한국전쟁 중 납북되고, 1957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주요 논문으로는 「소작인의 최소한도의 요구」(『신민』 제8호 기획 「소작문제에 취하야」 중, 1925.12), 「해소론은 일종 오류」(『별건곤』 제6-2호 기획 「신간회해소가부론」 중, 1931.2) 등이 있다.


본관은 대구 서씨(達城).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2]]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임청각(臨淸閣)

임청각에서 세 명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예언이 전해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임청각에는 정승 두 명이 태어났습니다. 조선조 중엽의 서성 선생(1558년-1631)과 조선조 말엽의 유후조 선생(1798-1876)이 그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임청각의 외손으로 모친들이 친정에 와서 이들을 출산했던 것입니다. 서성 선생의 어머니(고성 이씨 부인)는 이명 선생의 손녀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시각장애인었다고 합니다. 서성 선생의 부친은 서해라는 분인데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서 숙부가 후견인이 되어 조카의 혼사를 진행했습니다.

소호헌(蘇湖軒)

안동 소호헌(安東 蘇湖軒)은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徐懈)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약주(藥酒)

선조 때에 문신 [[서성(조선)|서성][(徐渻)의 집에서 빚은 술이 유명하였다.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사는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좋은 청주를 약주라 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임원경제지』에서도 “서충숙공이 좋은 청주를 빚었는데 그의 집이 약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술을 약산춘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약산춘이 약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식(藥食)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과(藥果)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약포(藥脯)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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