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진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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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진골목

대구 중구 진골길31에 위치한 진골목은 여성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진(긴)골목입니다. 1907년 2월 21일 대구 근면 대회에서 남자들이 나랏빚을 갚기 위해 금연을 결의하자진골목에 살던 일곱 분의 부인이 패물을 바쳤고 패물 헌납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대구 근대로의 여행 진골목은 약전골목 인근 종로의 샛골목으로 '긴 골목'이라는 뜻입니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던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가 탄생한 곳으로 달성서씨의 집성촌 한옥과 서양식 주택들이 다수 남아 있는 곳입니다.

대구 토착 지주 달성서씨 집성촌, 남일동 진골목!

달성 서씨들은 고려 시대부터 대구에 정착한 지방 호족으로 조정에 헌납했던 달성 토성(달성공원)을 비롯 구암서원이 있었던 동산, 남산동, 계산동, 산격동 등 그들의 땅을 밟지 않고선 영남대로를 지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진골목에는 지주들이 모여 살았으며 구한말에는 일제강점기 시대 토지대장 기록에는 서씨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합니다.

10만석꾼으로 불리며 풍유를 즐겼던 석재 서병오, 한국인 최초의 무진회사였던 '조양 무진'사장 서창규, 경상북도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 이인성과 함께 근대화단을 개척한 서병기, 서병직,국채 보상회 간부였던 서병규, 1915년 조선 국권 회복단에 참여한 서상규와 김응섭,고래등 같은 그의 집채가 그대로 남아있는 서병원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 이시영의 사돈이 진골목에서 서 씨 재력가로 소문나 있어 그의 아들을 애국단에 가입시켜 자발적으로 군자금을 희사 받기로 했으나 끝내 모른체했다고 합니다. 이시영은 그의 집에 아들을 앞세우고 권총으로 위협하며 침입했다가 정체만 드러낸 채 실패하고 2년간 옥고를 치른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달성서씨 이외에 동산 99칸 집의 주인인 안동 출신 거부 장길상, 장직상 형제는 물론한국인이 설립한 대구 최초의 은행인 '대구은행(경상합동읍행)' 설립자인 재력가 정재학,해방 이후 코오롱을 창업한 이원만, 약전골목에서 당재와 초재 거래를 하며 벼락부자가 된 김성달,1971년 창업하여 연간 2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평화클러치(현 평화발레오) 창업자 김상영,1973년 문을 연 로얄호텔 사장 등 1970년대까지 재력가와 기업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거주지였다고 합니다! 정소아과의원 건물은 1937년 대구 서부자로 불린 서병직의 가정집으로 지어진 2층 벽돌 양옥집입니다. 대구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민간 양옥 건물입니다. 1947년 고,정필수 원장이 매입하여 정소과의원을 개원, 해방 직후부터 약 60여 년간 진료를하였던 곳으로 진골목의 상징이자 근대 건축물 가운데 보기 드문 문화재급 건물이라고 합니다. 진골목 백록 식당으로 들어가는 담장에 그려진 인물 벽화가 있는데요. 한복 차림의 두 남녀의 주인공은 근대기 대구 제일의 부자였던 서병국과 그의 부인 정경주 여사라고 합니다. 정경주는 남일동 폐물 폐지 부인회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한 인물입니다.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장현 세자)가 묻힌 화성(수원) 현륭원으로 참배하러 가는 행차의 모습을 그린 '정조대왕 화성행행 반차도'가 있습니다. 한국의 집 카페는 진골목 넓은 마당을 갖춘 2개의 한옥 건물인데요.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택입니다. 1919년 당시 대구 최고 부자였던 서병국의 사촌인 서우순이 지은 집으로2018년에 보수하였으며 정면 7칸, 측면 3칸의 전통 맞배지붕 한옥입니다. 미도다방은 실버세대들의 사랑방 1번지입니다. 1982년 처음 시작해 1983년 미도다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초반 지금의 진골목으로 옮겨 2013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아 대구 근대 다방의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미도다방은 정치인을 비롯하여 특히 시인, 수필가, 서예가 등 문인이 많이 찾았으며,

2012년 3월 향년 108세로 타계한 한국 스카우트의 산증인 권영섭 옹도 단골이었다고 합니다.

목인 전상렬 시인의 시 '미도다방'에서는 미도다방이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놓는 사랑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석재 서병오 흉상도 있습니다.

석재 서병오(1862~1935)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영남 일원의 대표적 서화가로 명성을 날린 분입니다.

시, 글씨, 그림, 가야금, 바둑, 장기, 의술, 약재 등에도 능토하여 팔능거사로 불렸다고 합니다.

석재 선생은 흥선대원군과 교류가 잦았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크게 이름을 떨쳤으나

말년에 사업에 실패하여 재산을 다 날리고 지금은 그의 기념관조차 없다고 하네요

대구근대역사를 알 수 있는 진골목을 걸어보았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역사적인 사실들도 많이 알 수 있고

대구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