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현(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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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현(徐載賢).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1906년 11월 15일 황해도 장연군 서대면 송천동(현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서병호와 어머니 김구례(金求禮)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에 부친을 따라 상하이로 이주했고,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설립한 인성학교(仁成學校) 소년회 회장으로 부임해 "나라를 찾는데는 돈이냐 피냐"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던 1925년 5월 29일 상해대학 학생연합회에서 각 대학교에 조계공부국경찰서(租界工部局警察署)에 인치되어 있는 학생의 방면 및 배외운동을 위해 5월 30일부터 동맹 휴교하고 시위를 벌이자는 내용의 격문을 발송하자, 한인 유학생이 가장 많은 동제대학(同濟大學)과 호강대학(滬江大學)의 한국인 학생 25명은 중국 학생에 호응하여 배외운동에 협조할 것을 맹세하고 5월 30일 오전 9시에 학생연합회에 집회하여 각 학교에서 각자가 협정한 구역을 시위를 벌였다.

당시 동제대학 학생이었던 서재현은 최병락(崔炳洛), 김규선(金圭善) 등과 함께 시위에 참가했고, 오전 11시부터 상해 역전에서 대오를 정비하고 절강로 남쪽을 향해 행진하며 조계 회수, 제국주의 타파, 치외법권 철폐를 외쳤다. 이들이 오후 2시경 남경로에 이르렀을 때, 조계공부국(租界工部局) 노갑경찰서(老閘警察署) 경찰과 마주쳤다. 경찰이 이들을 향해 발포하자 중국인 학생 1명이 즉사했고, 시위대는 각기 흩어져 해산했다. 이후 그는 6월 1일부터 5일까지 조계 외곽에서 가두연설과 전단 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서재현은 1931년 9월 4일 김석의 자택에서 독립운동의 전위적 임무를 실천할 목적으로 조직된 상해한인독립운동 청년동맹의 중흥 방침을 협의한 뒤 1931년 11월 오후 8시부터 개최된 임시총회에 출석해 무력화된 청년동맹을 해소시키고 새로운 조직을 설립할 계획을 수립하는 등 일련의 임무를 일임받았다. 그는 1932년 1월 25일 프랑스조계 망지로에 위치한 중국요리점에서 이덕주, 유상근, 김덕근, 조시제, 이규서, 정충렬, 유진동 등 9명과 함께 모여 신당조직 준비회를 개최하고 신당의 명칭을 상해한인청년당(上海韓人靑年黨)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그는 이덕주, 김석과 함께 강령규약 선언서 기초위원에 선출되었고, 1932년 1월 31일에는 마량로 보경리 4호 대한교민단사무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당헌, 당칙, 선언서를 심의, 결정했다. 이 상해청년당의 목적은 조국 독립을 위해 한국 청년의 단체적 훈련을 도모하고 혁명 역량을 총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수사가 심해지자 상하이를 떠나야 했고, 이후 1944년 3월 난징에서 조직된 민족혁명당의 감찰위원으로 활동했다.

8.15 광복 이후 조국에 귀환한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중령으로 활동했고, 1955년 해군공창장을 역임한 뒤 준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한국기계공업 사장, 강업산업 주식회사 부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새문안교회 장로를 맡기도 했다. 또한 금성충무무공훈장, 은성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1999년 7월 14일에 서울 보훈병원에서 병사했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