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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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

한말에 일어났던 한글운동이 3·1운동 후 다시 일어나면서, 1921년 12월 뒤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된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이로써 민족의 숙원이며, 문화민족의 공탑이요 민족정신의 수호인 사전을 만들기 위한 일이 시작되어, 사전 편찬의 바탕이 되는 「한글맞춤법통일안」·「표준어사정(標準語査定)」·「외래어표기」 등을 제정하는 등 말·글의 연구 및 정리, 보급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 침략을 목전에 두고 조선 민족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해갔다.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한 후,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회원을,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회원을 검거하였다.

또한, 조선민족사상을 꺾고 나아가 조선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을 공포하여 독립운동가를 언제든지 검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이처럼 일제 탄압이 숨막히게 조여들자 조선어학회는 사전의 편찬을 서둘러 1942년 4월에 그 일부를 대동출판사(大東出版社)에 넘겨 인쇄를 하게 되었다.

경과와 결과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함흥영생고등여학교(咸興永生高等女學校) 학생 박영옥(朴英玉)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安田稔, 安正默)에게 발각되어 취조를 받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경찰은 취조 결과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감화를 준 사람이 서울에서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丁泰鎭)임을 파악하였다. 같은 해 9월 5일에 정태진을 연행, 취조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로써 일제는 3·1운동 후 부활한 한글운동을 폐지하고, 조선민족 노예화에 방해가 되는 단체를 해산시키고 나아가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을 모두 검거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1일, 첫 번째로 이중화(李重華)·장지영(張志暎)·최현배(崔鉉培) 등 11명이 서울에서 구속되어 다음날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잇따라 조선어학회에 관련된 사람이 검거되어,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이 때 증인으로 불려나와 혹독한 취조를 받은 사람도 48명이나 되었다.

사건을 취조한 홍원경찰서에서는 사전 편찬에 직접 가담했거나 재정적 보조를 한 사람들 및 기타 협력한 33명을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몰았다.

이극로(李克魯)·이윤재(李允宰)·최현배·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김윤경(金允經)·김양수(金良洙)·김도연(金度演)·이우식(李祐植)·이중화·김법린(金法麟)·이인(李仁)·한징(韓澄)·정열모(鄭烈模)·장지영·장현식(張鉉植)·이만규(李萬珪)·이강래(李康來)·김선기(金善琪)·정인섭(鄭寅燮)·이병기(李秉岐)·이은상(李殷相)·서민호(徐珉濠)·정태진 등 24명은 기소, 신윤국(申允局)·김종철(金鍾哲)·이석린(李錫麟)·권승욱(權承昱)·서승효(徐承孝)·윤병호(尹炳浩) 등 6명은 기소유예, 안재홍(安在鴻)은 불기소, 권덕규(權悳奎)·안호상(安浩相)은 기소중지하자는 의견서를 담당검사에게 제출하였다.

검사에 의해 이극로·이윤재·최현배·이희승·정인승·정태진·김양수·김도연·이우식·이중화·김법린·이인·한징·정열모·장지영·장현식 등 16명은 기소, 12명은 기소유예되었다. 기소자는 예심에 회부되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기소된 사람은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되었다. 같은 해 12월 8일에 이윤재가, 1944년 2월 22일에는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장지영·정열모 두 사람이 공소소멸로 석방되어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이들에게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 .”라는 함흥지방재판소의 예심종결 결정문에 따라 「치안유지법」의 내란죄가 적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함흥지방재판소의 재판은 1944년 12월부터 1945년 1월까지 9회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이중화·이우식·김양수·김도연·이인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가 각각 언도되었다.

이에 집행유예와 무죄선고를 받은 사람은 석방되었다. 실형을 받은 사람 중 정태진은 복역을 마치는 것이 오히려 상고보다 빠르다 하여 복역을 마치고 1945년 7월 1일 출옥하였다.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4명은 판결에 불복, 바로 상고했으나 같은 해 8월 13일자로 기각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자 8월 17일 풀려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