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회고록 - 1894년 5월,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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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회고록 - 1894년 5월, 워싱턴

1894년. 워싱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직장과 학교를 병행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 그 날 이완용을 만났던 밤의 불쾌한 악몽이나, 홍종우를 만났던 기이한 경험은 빠르게 잊혀져갔다. 나는 조선인 서재필로서의 악몽을 지우고, 미국 의대생 필립 제이손으로서 바쁘게 살아갔다. 사 년 간의 학교 생활을 마치고 1892년에 컬럼비안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가필드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의사 수련생으로서 환자를 만나는 두렵고도 기대되는 그 첫 번째 순간, 나는 미래의 의사 생활이 순조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수의 뒤를 따라 회진을 들어간 병실에서 노부인이 하나가 경기에 들린 듯 놀라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설마 저 노란 원숭이를 내 병실에 들이려는 것은 아니지요? ” 당황스러웠지만 오기를 부려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노부인은 거의 반쯤 넋을 놓은 상태로 약병을 집어던지며 발광했다. 결국 나는 밖으로 나갔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노부인을 붙들고 간신히 진정시켰다. 첫날 신고식을 호되게 치른 후에도 비슷한 일이 가끔 생겼다. 대개는 노인들, 특히 노부인들이 그러는 일이 잦았다. 평소 유색인종인 내게 가장 친절한 것이 노부인들이었음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그들의 친절은 차별받는 불쌍한 사람에 대한 동정이었겠지만, 그들의 생활권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극도로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졌다. 황인종이라며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보기도 하고 웃는 얼굴로 대꾸해보기도 했는데, 그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무신경하고 냉정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컬럼비안 대학에서 오년간 의학을 전공하고 의사 면허를 받았으니 그에 따른 존경을 보여달라고 말하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불만과 의심이 섞인 표정으로 진료를 받아들였다. 일 년 가량의 수련의 생활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직장인 미군 의무부대에서의 보직을 도서관 업무에서 연구소 업무로 변경했다. 연구소장인 리드 박사는 나를 정식 의사로 인정하고 전염병 예방 연구 과제에 투입시켰다. 병리학은 당시로서 첨단 연구분야였다. 전염병의 원인을 세균으로 인식함에 따라 어떤 방법으로 전염병을 줄일지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다. 당시 미군은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은 상황이었으므로, 병리학 연구는 의무부대에서도 가장 독립적이면서도 중요한 연구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업무와는 별도로 학문적 연구도 계속 장려되었다. 나는 리드의 권유로 주말에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병리학과 세균학을 청강했다. 관련된 비용은 의무부대에서 제공되었다. 약 육칠 개월 가량 연구소에서 일을 했다. 연구소 업무는 적성에도 잘 맞았고 재미도 있었다. 첨단의 연구를 수행한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얼마간 연구를 지속하면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학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급여나 승진의 기회였다. 학위를 위해 적지 않은 등록금을 지불했으나 공무원은 의사라고 특별히 보상이 추가되는 것이 없었다. 평균적으로 의사가 버는 돈과 비교하면, 보상이 너무 적었다. 게다가 공무원은 승진 기회도 드물고,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보이지 않는 인종 차별도 있었다. 첫 번째 진급 관문에서 쓴 맛을 보고서야 나는 앞으로도 승진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오년이나 십년 정도 더 공무원 생활을 할 경우 얼마의 돈을 벌지 셈을 해봤다. 까마득했다. 이 곳의 물가를 감안했을 때, 내 손으로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에 터무니 없이 모자란 액수였다. 대학교 입학하던 날 법학 대신 의학을 택하면서, 사회적인 지위와 영향력을 얻지 못한다면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택한 의학인데 공무원으로서 벌게될 돈은 정말 서민으로 살아가기에도 근근할 정도였다. 나는 여러 가지로 고민하던 끝에 마침내 오년 간 재직했던 미군 군의참모부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개인 병원을 개업하기로 했다. 주변의 만류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 모험은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내게 돈 버는 재주가 그렇게까지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나는 모아두었던 돈에다 약간의 빌린 돈을 합쳐서 간소한 사무실 하나를 임대했다. 거기에다 병상 하나와 사무용 책상 하나를 가져다 두고, 개인 병원을 개업했다. 주로 감기나 배탈 등의 간단한 내과 치료나 종기, 베인 상처 등의 가벼운 외과 치료를 주로 했다. 의사가 황인종임을 확인하는 순간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호기심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병원은 간신히 문을 닫지 않을 만큼 운영되었다. 벌이는 군의참모부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보다 줄었다. 벌이를 늘이기 위해 공무원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 것인데. 당황스러웠지만 사업 형편이 생각처럼 금방 펴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긍정적인 기대를 가지기로 했다.

뮤리엘 암스트롱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나는 원래 쾌락에 큰 흥미가 없었다. 십 년 가까운 미국의 독신생활 중에서 술과 여자는 거의 가까이 하지 않았다. 딱히 금욕생활을 했다기보다는 별로 그런 것이 끌리지 않았다. 원래 조선에서 살던 때에도 그다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었거니와, 미국 생활에서는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러던 내가 여자를 만났다. 뮤리엘과 처음 만난 것은 교회에서였다. 주말에 교회에서 오가며 얼굴은 여러 번 마주쳤는데, 길쭉하고 호리호리한 서양 미인인데 눈매 어딘가에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냥 그 정도였을 뿐,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느 날 심부름꾼이 찾아와 환자가 있으니 왕진을 부탁했다. 왕진가방을 들고 어느 호텔로 찾아갔더니 뮤리엘과 그녀의 어머니, 두 사람이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다. 약간의 치료를 마치자 젊은 뮤리엘은 금방 증세가 호전되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보름 이상을 계속 앓았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 때문에 계속 왕진을 다녔고 그러면서 뮤리엘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조선의 여자와 미국의 여자는 달랐다. 조선은 내외가 있다. 혼인을 하기 전에도, 혼인을 하고난 후에도, 여자와 남자는 내외를 했다. 부인은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어모셨고, 집안에 어려움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꼼꼼하게도 집안을 꾸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표정이 없었다. 슬픔도 기쁨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속으로만 삭히고, 겉표정은 항상 무뚝뚝했다. 조선의 여자들은 살림하는 목석 같았다. 미국의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집안에서 살림을 돌보고 아이를 키우는 것은 조선과 미국이 다를 바 없었으나, 미국 여자들은 훨씬 더 사람 같았다. 표정이 있었고 감정 표현이 있었다. 뮤리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재미있고 즐거웠다. 그녀는 아주 여성적이고 나긋나긋했으며, 역사와 예술과 문화에 대한 여성적 감수성을 가졌으며, 아주 귀여운 유머감각을 가졌다. 모두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었다. “열병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세균 때문에 생긴다고 하셨죠? ” “그렇지요. 외부의 세균과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몸에 열이 나는 것입니다.” “논쟁을 벌이면 볼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은 원리군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이런 농담을 할 때면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완치된 이후에는 교회에서 만나거나 가끔 그녀가 병원을 찾아오기도 했다. 우리는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서른 살, 뮤리엘은 스물세 살이었다. 스스로를 서재필이라고 부르던 시절에 나는 이미 두 번 결혼했었다. 첫 번째 부인인 경주 이씨는 몸이 약해서 혼인 다음 해에 죽었고, 재혼했던 광산 김씨는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갑신년에 온 집안이 몰락할 때 죽었다. 이제 결혼한다면 세 번째가 된다. 조선의 결혼과 미국의 결혼은 의미가 조금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든 미국이든 결혼이란 그 사회의 안정된 구성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아직도 미국인으로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있다. 혼자 사는 것보다는 이 나라의 여성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는 편이 낫다. 하지만 아무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 유색인종으로서 배경이 전혀 없는 내 핸디캡을 채워줄 수 있는, 더불어 가치관과 취미가 맞는 여성이어야 한다. 뮤리엘 암스트롱이라면 모든 것을 만족시킨다. 그녀는 다정다감한 여성적 성격에 지성과 미모를 모두 갖췄고, 작고한 그녀의 부친은 철도우편국을 설립하고 초대 국장을 역임했던 사회 지도층이었다. 적어도 워싱턴의 사회지도층들은 철도우편국의 미스터 암스트롱이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뮤리엘은 내게 결핍한 모든 것을 채워줄 수 있다. 나는 뮤리엘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주변의 반대, 특히 뮤리엘의 어머니의 반대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다. 뮤리엘의 어머니는 최근 재혼했고, 유색인종 사윗감을 내켜 반가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반대할 입장도 아니었던 것이다. 현실적인 결혼 생활 준비를 하려니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특히나 주택 자금이었다. 나는 명색이 의사지만 돈은 거의 없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는 정부에서 직원에게 제공하는 독신자 숙소를 이용했는데, 개인병원을 창업하면서부터는 숙소가 없었다. 처음에는 사무실 안에서 지냈고, 이후에는 저렴한 호텔에서 장기투숙하고 있었다. 한 여자를 데리고 살면서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급하게 제대로 된 집을 구하려니 돈이 부족했다. 보증금으로 두세달치 임대료를 납부하고, 또 월세로 적어도 이삼십 달러를 내야 했다. 게다가 그런 집들은 교통이 불편했다. 존스홉킨스 대학의 청강 생활을 병행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어느 날 박채호를 만나서 이런 고민을 이야기 했더니, 박채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조선 공사관 건물을 사용하시면 어떻습니까? ”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자 박채호도 함께 웃으며 말했다. “모양새가 우습기는 하지만, 요즘 조선 공사관에는 사람이 없어 귀신이 나올 지경입니다. 박정양 대감, 이완용 대감 모두 조선으로 돌아간 것은 알고 계시죠? 작년에는 시카고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조금 시끌벅쩍했지만 그것도 다 끝났습니다. 남아있는 사람은 대리 공사 이성수 대감 한 사람이라서, 제 아들놈이 날마다 공사관 빈 방 청소나 하는 형편입니다.” 조선 공사관이 모두 철수했다는 사실은 예전에 박채호에게 들었다. 박채호는 갑자기 공사관 직원들이 철수한 이유는 잘 몰랐다. 알지만 모르는 척 할 수도 있는데, 나로서도 조선공사관의 근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공사관에 유숙한다는 생각을 하자 우스웠다. 나는 역적인데, 역적이 공사관에 투숙한다니. 말이 되는 일인가? 우스꽝스럽다. 내 생각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채호는 넉살좋게 웃으며 아들인 박용규를 불렀다. 박용규는 그의 아버지처럼 작고 통통한 체격에, 웃을 때면 눈이 없어질 듯 작아지는 사람 좋은 인상이었다. 박채호는 그가 원래는 자신의 일을 돕다가, 작년 시카고 박람회 때 통역이며 이런저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서 공사관 일을 돕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공사관 집사노릇까지 하고 있다며 웃었다. 박채호가 공사관의 빈 방 하나를 내달라고 하자 박용규가 하하 웃으며 조금 방정맞게 수다를 떨었다. “마음대로 쓰시지요. 어차피 놀고 있는 방입니다. 일층은 접견실이고, 삼층은 대리공사께서 쓰고 있으니, 이층은 비어있습니다. 이층에 방이 넷인데, 그 중 방 두 개는 제이손 박사께서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거금 이만오천 달러를 주고 산 건물인데 쓰든 안 쓰든 나가는 돈은 똑같으니까요. 음식도 나눠 먹을수록 더 맛있듯이, 집도 나눠 쓰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 모로 박용규의 말은 솔깃했다. 조선 공사관은 값비싼 주택이라서 월세를 주고 구할 수 있는 집보다 훨씬 시설이 좋았고, 교통도 편했다. 게다가 무료라니. 지금처럼 어려운 형편에, 가리고 어쩔 처지가 아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문제는 조선 때문에 그토록 심적 고통을 겪었으면서 조선 공사관에 얹혀살 수 있냐는 것이다. 나는 조선인 서재필이 아니고, 미국인 필립 제이손 아닌가. 하지만 정말로 내 영혼 밑바닥에 쌓인 조선에 대한 기억까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선 공사관에서 조선에 둘러쌓여 살면, 다시 날이면 날마다 민비와 청군과 백성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지는 않을까. 순전히 내 마음먹기 나름이지만 뮤리엘이 곁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문제는 조선 공사관의 입장이다. 나는 아무튼 아직도 조선의 대역죄인이었다. 그 사이 조선의 소식을 못 듣기는 했지만, 내가 사면되었을 리가 없다. 몇 년 전, 대리공사였던 이완용을 만났을 때 그는 피차간 만나봐야 좋을 것이 없는 사이니 못 만난 것으로 하자고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공사인 이성수는 조선의 역적인 나를 한 지붕 아래에 유숙시킬 수 있을까? 첫번째는 몰라도 두번째 문제는 내가 판단할 수는 없다. 조선 공사에게 답을 얻어야 한다. 나는 박용규를 통해 먼저 언질을 띄운 후 공사를 찾아갔다. 혼자 남아있는 대리공사 신분인 이성수는 내가 찾아온 것을 반기는 눈치였다. “워싱턴에 서재필 선생이 계시다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온지 석 달이 되었는데 처음 인사를 드리니 이것은 제 불찰입니다.” 나는 인사치례를 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사관에서 거주해도 좋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만, 저는 조선의 중죄인 신분인데 대리공사께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 바꿔 말해서 조선의 역적인 내가 공사관에 머물러도 되냐는 질문이었다. 이성수는 겸연쩍은 미소를 짓더니,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상께서 저에게 아주 어려운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얻고, 군인을 파견받고, 기술자를 초빙하라는 어명입니다. 저는 영어도 짧고 이 나라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 모든 임무를 저 혼자 부여받은 입장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박용규 군과 그의 아버지가 많이 도움을 주지만, 나랏일을 함께 논의할 경륜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요.” 아마도 이성수 개인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니고, 최초 미국 공사관을 만들 때 공사에게 주어진 임무일 것이다. 당시에는 아무튼 일할 사람이 예닐곱 명이나 되었으나 지금은 대리공사 한 사람이 간신히 공사관을 지키고 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임금이 실무의 어려움을 고려하며 어명을 내릴 리도 없다. 결국 이성수는 내게 공사관 일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선과의 인연을 확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조선공사관만큼 좋은 조건의 신혼집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는 조선 백성이 아니고 미국 시민입니다. 게다가 저는 개인 사업자로서 병원을 운영하느라 시간이 없어, 낮 시간에 공사관의 직원처럼 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번역이 필요하거나 미국의 행정 관행을 알려드리는 정도의 도움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이성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떡였다. “물론입니다. 서재필 선생께서는 공식적으로는 공사관의 직원이 아니고, 그러니 어딘가에 공사관 직원으로 나설 일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답답할 때 하소연이나 조금 들어주시고 막막할 때 방향이나 좀 이끌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왕 이야기를 하는 자리라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제 미국인이니 서재필 대신 제이손 박사로 호칭해주십시오.” 이성수와 대화를 마치고 몇일 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미국 사회니 계약서는 쓰기로 했다. 닥터 필립 제이손은 조선 공사관 2층의 방 두 개를 향후 삼 년간 사용하며, 그 댓가로 일주일에 여덟 시간 씩 업무를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말할 수도 없이 내게 유리한 계약이지만, 이성수의 입장에서도 어차피 비어있는 공사관을 빌려주면서 아쉬울 때 조력을 받을 수 있으니 만족하고 있었다. 공사관 건물은 월세 삼십 달러를 내고 빌리는 집보다 훨씬 좋았다. 그 집은 썩 좋았다. 저택이라 부를만한 석조 건물이었고, 방에는 성능 좋은 벽난로도 있어서 겨울을 보낼 걱정도 없었다. 공간 여기저기에는 조선에서 가져온 장식물이 있어, 뮤리엘은 무료로 아시아 여행을 하는 기분이라며 즐거워했다. 가장 어려웠던 집을 구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제 결혼 준비는 급진전 되었다.

뮤리엘 암스트롱의 모습. 사실 이 시대에, 주류 인종의 여성이 옐로우몽키(...) 남성과 결혼했다는 사실은 참 놀랍습니다. 당시는 아직도 흑인은 태생적으로 열등하다든지, 대놓고 '중국인 배척법' 같은 것이 발효되던 시대에, 과연 뮤리엘이 서재필을 택하도록 만들었을는지. 

서재필이 결혼 전 조선공사관에서 살았다는 부분은,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만 조금 진위는 의심스럽습니다. 앞뒤 상황이 너무 이상하지요. 조선에 최대한 거리를 두고, 가급적 조선에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던 서재필의 태도와도 맞지 않고, 조선 공사관에서 역적인 서재필을 받아준 것도 이상합니다. 

서재필이 조선공사관에서 방을 얻어 살았다는 것은 박용규라는 조선공사관 근무자가 후일 자신이 많이 도와줬다고 증언한 것을 근거로 삼을텐데, 조금 의심스러운 면이 있으나,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하지요.  


이 조선공사관에서 방을 얻어 생활한 것을 아주 빈곤했던 삶으로 묘사하는 서재필 위인전기들이 많습니다만, 만약 저기서 살았다면 그 생활이 대단히 궁상맞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박정양 등이 처음 건너왔을 때 2.5만 달러에 구매를 한 대저택인데, 최근 문화재청이 350만달러에 인수했다더군요. 우리돈 약 40억원의 저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