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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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10월 22일 (토) 10:3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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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림(徐林)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모사(謀士).

명종 때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던 임꺽정(林巨正)의 모사로 알려져 있다. 1560년(명종 15) 11월 이름을 ‘엄가이(嚴加伊)’로 바꾸고 서울에 잠입하려다 숭례문 밖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변절하여 장수원(長水院)에서의 임꺽정 처 구출사건, 봉산군수 이흠례(李欽禮) 살해 모의 사건 등을 발고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 임꺽정을 잡는데 적극 협조하였다. 이듬해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加都致)가 잡힌 뒤 그를 임꺽정이라 하는 주장이 있자 임꺽정의 형임을 증언하였으며,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에게 협조하여 임꺽정을 체포하게 하였다.

1562년 의정부에서 서림의 일을 처리할 방도를 논의하였는데 이준경(李浚慶)이 서림이 원래는 적당(賊黨)이나 귀순하였으니 죽이지 말자는 주장에 따라 상을 주어 방면하였다. 이러한 서림의 변절은 뒷날 사람들로부터 간교한 인물의 표본으로 생각되게 하기도 하였다. 한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명종 때의 간신(奸臣) 기대항(奇大恒)을 서림이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서림(徐林)이 / 김사인

괴로웠겠지

배신이 식은 밥 물말아 먹듯 쉬운 일은 아니므로

어쩔 수 없는 두려움 앞에서 자신이 미치게 모멸스럽기도 했겠지

가장을 기다려 풀죽어 있을 아내와 새끼들 생각에

호젓한 곳을 찾아 피눈물도 쏟았으리

낯두껍게 뻔뻔스럽지 못하여

차라리 비굴을 택했던가

삼강과 오륜의 허망함을 알았다 하나

아사리판 세월에

지닌 건 다만 먹물 몇 방울

거친 산도적들 틈에 몸을 던진 것은

사내의 호기가 아니라 도피가 아니었더냐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서림이를 생각한다

그 비굴과 눈물겨운 교활함을

욕만 해서는 안 될 일 같아서

마침내 비명횡사하는 서툰 배신의 끝을

개운해해서만은 안 될 일 같아서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