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희(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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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희(徐廷禧) 농민운동가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 제헌국회 국회법제정 기초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농민운동가. 본관은 대구 서씨. 호는 농천(農泉) 또는 묵재(默齋). 본적은 경기도 포천군. 서성(徐渻)의 12대손이다. 아버지는 선전관(宣伝官)을 지낸 서병갑(徐丙甲)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8세 때부터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인 1894년 3월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896년 6월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1900년 8월 전라남도 광주 우체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 1월 나철, 정인식 등 33명과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계획하였다.같은 해 광주에서 대한협회 광주지회를 조직하였으며, 동시에 의병운동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1907년 2월 권중현(權重顯)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진도(珍島)에 5년간 유배되는 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광주에 머물면서 1913년 10월 사립광주법학강습소 창립에 참여해 교수가 되었다.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뒤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15년 2월 가산을 정리,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3년간의 만주 생활을 마치고 1918년 광주로 돌아와 생활하면서 북문안교회에 다녔다. 1919년 3월 광주에서 반일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이 때 일반 시민의 동원을 담당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년이 감형되어 석방되었다.1920년 10월 출옥한 후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에 참여, 1921년 6월 광주지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22년 3월 광주노동공제회 안에 설치된 소비조합 창립위원이 되었고, 노동자합숙소를 만들어 노동자의 복지 향상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923년 4월에는 광주소작인연합회 결성에 참여한 뒤 1925년까지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1924년 1월 진주에서 열린 경남노농운동자간친회에 참여하고, 3월 전라노농연맹, 남선노농동맹 결성을 주도하였다. 4월 조선노농총동맹이 창립되자 중앙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이 무렵 북풍파 공산주의 비밀결사인 ‘까엔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6월 언론집회압박탄핵회 결성식에서 임시의장을 맡고, 언론집회 탄압에 대한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이 탄핵대회 때문에 한때 일제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9월 조선기근구제회 조직에 적극 가담하고 서무부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1월에는 서울에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풍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12월 북풍회가 일본 사회운동가들에게 보낸, 조선과 일본 무산계급의 연락과 제휴를 더욱 유기적으로 완전히 하자는 내용의 선전문에 집행위원 12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1925년 7월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대홍수가 발생하자 직접 구조 및 구제활동에 나서는 한편, 조선기근구제회 중앙부 위원을 담당하였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1월 당내 북풍회에 가담하여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정권(停權) 처분을 받았다. 12월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1926년 6월 보석으로 풀려났다.이후 사회활동을 금지당했으나, 그 해 11월 조선노농총동맹 상무집행위원으로 다시 선출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에게서 보석 취소협박을 받기도 하였다.

1927년 11월 조선공산당사건 관계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1928년 2월 무죄를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이 때 오랜 감옥생활과 연로한 나이로 인해 위장병이 심해지자 면회 온 친구에게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출옥 이후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30년 11월 신간회 전체대회대행중앙집행위원회에서 김병로(金炳魯) 체제의 중앙상무집행위원 및 조직부장에 선정되었다.이후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되자 해소론에 반대하였다. 서정희는 오류는 사회주의자가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한 것에 있으며, 한번 참여한 이상 신간회 내부 조직을 더 충실히 하고 각 부문으로 나아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1년 11월 만주동포문제협의회의 위문사(慰問使)로 만주 각지의 14개 피난동포 수용소를 방문, 국내 동포의 위문품을 전달하는 등 약 한 달 정도 활동한 뒤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민중의 구제사업에 많은 관심을 갖는 한편 조선인의 만주 이민을 적극 장려하였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중앙감찰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한국민주당에서 주최한 신탁통치반대 전국대회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3월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 1947년 4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지도위원, 같은 해 6월 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본부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한국민주당의 핵심 간부로 떠올랐다.

1948년 5·10선거에서 한국민주당 공천을 받아 고향인 경기도 포천군에서 출마,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해 6월 제헌국회에서 국회법 제정 기초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7월 한국전쟁 중 납북되고, 1957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주요 논문으로는 「소작인의 최소한도의 요구」(『신민』 제8호 기획 「소작문제에 취하야」 중, 1925.12), 「해소론은 일종 오류」(『별건곤』 제6-2호 기획 「신간회해소가부론」 중, 1931.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