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선구자 서상륜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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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교회는 소래교회입니다 1883년 5월16일 서상륜,서경조 형제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마을에 초가집 예배당인 소래교회를 세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역사의 격변기 속에 지금은 소래교회는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초기 한국교회에 중요한 3개의 교회가 있는데 바로 인천내리교회와 정동제일교회 그리고 새문안교회입니다. 이들 교회는 창립일을 각자 가지고 있지만, 이들 교회 모두 창립일 이전에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실질적으로 교회가 시작되는 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문안교회가 1885년 7월2일, 정동제일교회가 7월17일 그리고 인천내리교회가 7월29일로 며칠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다만, 2년 뒤 새문안교회가 1887년 9월27일 14명의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3명의 성도에게 세례를 베풀고 장로 2인을 세우며 오늘날과 같은 교회조직을 갖추고 정식으로 새문안교회를 창립합니다. 이때가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가 세워진 시점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최초의 교회는 소래교회, 최초의 조직교회는 새문안교회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에 가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캠퍼스가 있는데, 그 캠퍼스의 생활관 뒷편에는 아늑한 한옥 기와집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곳은 한옥 개인 주택이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

아펜젤러와 함께 공식선교사로 최초 입국한 선교사 언더우드는 평양을 거쳐 황해도 소래교회를 방문하면서“우리는 이 땅에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추수하러 왔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말 그랬다. 그는 선교사로 미지의 땅에 첫 발을 내디뎠다 생각했는데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음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상륜의 한국교회사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선교에 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1874년 고려문을 넘나들며 홍삼장사를 하는 의주청년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등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다 장사 수입보다 많은 것을 줄 테니 자신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내 의주청년들은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었고 그 과정에서 성경말씀을 익히고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사람으로는 최초로 만주에서 세례교인이 되었다.

한편 서상륜(徐相崙 1849~1925)은 양반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문수학을 했다. 그는 한문공부를 많이 했을 뿐 아니라 중국말도 잘 했다. 그런데 고려문을 넘나들며 홍삼 장사를 하던 중 뜻하지 않게 영구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온몸이 불덩이 같은 고열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때 이미 기독교를 접한 이응찬이 그를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안내하였다. 전염병으로 생명의 위급함에 처한 서상륜은 서양병원에서 선교사 헌터(Joseph M. Hunter)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점차 회복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심양에서 로스 선교사의 한글 성서번역사업에 동참하게 되었고 한문 실력이 출중한 그는 로스 선교사의 성서번역 사업에 오른팔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당시 조선은 대동강변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사건 이후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머지않아 조선에도 선교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이라 믿고, 조선청년들에게 투자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서번역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마침내 1882년 3월 24일 심양에서 한글성경 누가복음 3천 권이 최초로 발간되었다. 이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작업은 서상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성경을 로스와 서상륜의 공동번역이라고도 말한다. 그렇게 성경을 번역한 서상륜은 또 하나의 사명을 갖고 자신이 번역한 복음서를 안고 압록강을 건너 고향 의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당시는 성서 반입이 불법인지라 고려문을 통과하다가 국경 관리들에게 적발되어 붙잡혔다. 다행히 먼 친척인 김효순의 도움으로 성경 10여 권만을 챙겨가지고 밤에 도주하는 데 성공을 한다.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위기를 느낀 그는 동생 서경조와 함께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의 소래(송천, 松泉)로 피신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자기 가슴속에 몰래 숨겨온 성경을 가지고 외가 친척과 인근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전도가 점차 활기를 띠면서 가정집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로써 1883년 5월 16일, 한국 최초로 외부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세워진 소래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 이후 소래교회 예배당을 건축할 때의 일이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건축자금을 미국에 가서 모금하여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서상륜을 비롯한 소래교회 교인들은 “우리가 우리 예배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 것은 본의에도 어긋나며, 후세에 전하는 데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정중히 거절하였다. 언더우드는 그 뜻을 존중하면서 미국으로부터 가져온 석유램프 5개를 소래교회에 기증하였다. 그런데 불빛이 얼마나 밝았던지 그 빛이 온 동리를 환하게 밝혔다고 한다. 이렇듯 소래교회는 한국최초 예배당인 동시에 외국의 원조 없이 자생적으로 세운 교회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가진다. 한편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에 의하여 서울에 설립된 최초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창립될 때 참여한 14명의 최초교인들도 서상륜과 백홍준이 전도한 교인들이었다. 그 이후 서상륜은 새문안교회의 조사로 세워졌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동역자가 되었으며 선교초기 권서인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사역에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한국교회 선교역사에 초석을 놓으며 선구자의 삶을 사신 서상륜은 1925년 12월 16일 7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비록 평신도였지만 그의 장례는 장로교총회장으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평신도의 장례를 장로교총회장으로 예우한 것은 전례에 없는 특별한 일이었다. 한편 그의 동생 서경조는 장로교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아들 서병호는 독립운동가로 상해에서 활동하였으며 그의 후손으로는 서원석 장로(전 대한성서공회) 서경석 목사 등이 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서상륜과 같은 인물이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희생과 헌신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최초선교사 언더우드 ‧ 아펜젤러 입국 이전에 이미 서상륜은 이 땅에서 사도행전적인 삶을 이루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서상륜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기독교계 인사 및 각 신학대학교총장 교수들의 뜻을 모아 발기하고 추진하여 2006년 6월 20일 용인 총신대학교 신대원캠퍼스에한국기독교선구자 서상륜 기념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