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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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암서원(慕巖書院)

모암사(慕巖祠).모암서원(慕巖書院)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시중(侍中) 절효공(節孝公) 서능(徐 稜)선생을 시조(始祖)로 효(孝) 충(忠)과 덕(德)을 받들며 충효정신(忠孝精神)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문중이다.

장성서씨시조 서능 선생의 출중한 효행에 하늘이 감동한 이야기는 고려사열전 효우편(高麗史烈傳孝友編)등 역사에 기록되어 조선조 때 교과서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교재로 씌어져 우리 겨레 효의 모범으로 인용되어 오고 있다. 선생은 향리인 장성(長城)에 학문의 도(道)를 펼치셔서 ‘장성에 문향의 고장이 되도록 기초를 닦으신 분으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선생께서 남기신 가훈 거가십훈(居家十訓)은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전통가훈 중 가장 오래 된 가훈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이 사시던 장성군 북일면 작동리 앞에는 선생의 효행과 덕행을 기리는 정려비(1578년에 영상思庵 朴淳이 글을 짓고 玉峰 白光勳이 글씨를 씀)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전해오고 있는바 향토사를 전공한 이병직 장성문화원장이 다음과 같이 선생을 흠모하고 있다.

“일찍이 하늘을 감동시킨 효행으로 인륜(人倫)의 도(道)를 밝히시고 이 고장에 학문의 씨를 뿌려 문향(文鄕)의 터전을 마련하신 어른이 계시니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살아 계실 서능(徐 稜) 선생이시다. 일찍이 기노사(奇盧沙)도 서 시중(徐侍中은 비록 연대는 멀지라도 족히 효렴(孝廉)의 사풍(士風)을 징(徵)하여 사류(士類)의 취하는 연원(淵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고 하신 선생의 자(字)는 대방(大方)이요 시호(諡號)는 절효(節孝)이시다.

약관에 대과에 등과하여 고려 고종조(高宗朝)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의 관직에 이르렀으나 벼슬을 사직(辭職)하시고 1246년(高宗33년)12월에 향리에 돌아와 홀로 계신 모친을 봉양하시던 어느 날 母親의 목에 큰 종환이 생겨 의원을 청하여 보이니 의원이 보고는 생개구리가 없으면 낫기 어렵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때가 엄동설한이라 생 개구리를 얻을 길이 없어 슬프게 흐느끼시니 이를 본 의원이 딱하게 여겨 비록 생 개구리는 없으나 약을 합제하여 줄 터이니 발라 보자고 하였다. 이약을 나무 아래서 볶고 있는데 갑자기 약을 볶는 솥 안으로 무엇인가 떨어지는 것이 있어 살펴보니 생 개구리였다. 의원은 깜짝 놀라 ”아들의 지극하신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개구리를 내려 주셨으니 모친의 병환은 곧 나을 것“ 이라고 하였다.

이 약으로 모친의 병환은 씻은 듯이 나으셨다. 선생의 효행은 온 나라에 알려져 감천지효(感天之孝)라고 모두들 칭송하니 조정에서는 정포(旌褒)를 내려 백성의 귀감으로 삼았다.

고려사(高麗史)는 오백년간 사서(史書)에 기록되고 정표된 십여인에 불과한 효우편(孝友篇)에 선생을 포함하여 소개하고 있다.

또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 장성현 영이조(長城縣靈異條)에 선생의 효행과 덕행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때 편찬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타와도(墮蛙圖)와 함께 효도하는 그 정성에 하늘이 감동하니 감응의 신묘함은 헤아리기 어렵도다 라고 적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주자학(朱子學)이 전해지기 전에 이미 유학(儒學)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행하신 선각자로서 모암(慕巖)에 초당(草堂)을 짓고 후학양성에 진력하시어 이 고장을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 되도록 그 초석을 놓고 다져 주셨다. 선생은 모친상을 당하여 진사(辰巳)년간 여막(廬幕)에 계셨는데 이 때 친척의 자제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게 된 바 그 중에 나이 어려 예절을 모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대한 례법(禮法)을 취하여 1257년(고종44년) 거가십훈(居家十訓)을 지어 문인(門人)들은 물론 향민(鄕民)들에게도 인간이 바르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하여 향풍(鄕風)을 순화시켰다.

거가십훈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眞理)를 담은 교훈으로서

부식삼강(扶植三綱:삼강을 바로세워라)

돈서오륜(惇敍五倫:오륜을 돈독히 펴라)

관이어하(寬以御下:아래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라)

예이사상(禮以事上:윗사람은 예로서 섬겨라)

임상치애(臨喪致哀:상을 당하거든 슬픔을 다하라)

당제치경(當祭致敬:제사는 경건하게 모셔라)

지심이공(持心以公:마음은 항상 공평하게 가져라)

처사이의(處事以義:일 처리는 정의롭게 하라)

교자이정(敎子以正:자식은 바르게 가르쳐라)

대인이서(待人以恕:다른 사람은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하라)

등 10덕목을 하나 하나 마음가짐과 행하는 길을 구체적으로 밣히고 있는데 이를 우리나라 가훈의 효시(嚆矢)로 손꼽고 있다. 이 거가십훈(居家十訓)을 통하여 우리는 선생께서 대학자요 위대한 실천가이며 앞날을 내다보신 선각자임을 알수 있고 도덕적 자품과 대인의 품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선생의 행적은 앞에 든 기록외 에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오산명인록(鰲山名人錄) 장성읍지(長城邑誌)등 문헌에 상세히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시조(始祖) 절효공(節孝公) 서능(徐 稜)선생의10세손에서 3파로 장파는 휘 화(華:진사공) 중파는 휘 굉(紘:승지공) 계파는 휘 관(寬:판서공)로 장파는 주로 광양지역에 살고 중파는 주로 장성. 고창. 정읍지역에 살고 계파는 황해도. 강원도.해주지역일대를 중심으로 인근에 대를 이어 번성하여 왔다.

그러나 장성서씨 절효공의 후손들은 먼 옛날부터 단일 대종회를 구성하여 숭조(崇祖)와 돈목(敦睦)에 힘을 모아 왔으며 1647년 최초의 족보를 발간한 이래 1996년까지 사이 12회에 걸쳐 족보를 발간해 오고 있다.

조선말과 일제 초기까지 장성서씨가 한 지역 인구의 80% 이상의 집성촌(集姓村)은 황해도 연백군 온정면 락선리. 백천군 해월면 용봉리. 강원도 이천군 동면과 서면 및 안협면 정동 문암 퇴탄지역. 전라북도 정읍 이평과 마항 및 절라남도 광양군 옥곡면 장동지역 등으로 분포되어 있다.

전남 장성군 북일면 성덕리 용전동 종산에는 시조 절효선생 서능(徐 稜)의 단소와 2세조 휘 준(俊)의 묘소가 모셔져 있어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이곳에서 시향(時享)을 모셔 오고 있다.

▣ 주요(主要) 유적(遺蹟)

용전동(龍田洞)에는 절효공(節孝公) 서능(徐稜)선생의 제단(祭壇)인 절효서선생지단(節孝徐先生之壇)과 신위를 모신 용전사(龍田祠)가 있어 먼 옛날부터 장성 지방 유림(儒林)들이 매년 봄3월10일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으며. 재각 용전재(龍田齋)가 있다.

용전재 앞에는 신도비(神道碑) 장성서씨시 조절효공서능 선생 신도비(長城徐氏始祖節孝公徐稜先生神道碑)가 세워져 있고. 절효공께서 사시던 옛 집터로서 생 개구리가 약을 뽂던 솥으로 떨어진 감천타와(感天墮蛙)의 성지(聖地)가 장성군 북일면 박산리에 있다.

1578년 절효공의 출중한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각(高麗侍中節孝徐先生之碑閣) 비문은 영상 思菴 朴淳이 짓고 당대의 명필 玉峰 白光勳 씀)이 박산리에 있는 바 문화재(전라남도 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어 오고 있다.

1587년에 서삼면 모암리에 세워진 모암서원(慕巖書院)은 절효공을 모신 사당(祠堂)과 양편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앞에 큰 강당이 있어 고을의 선비들이 절효공의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벽에 걸어 높고 그 아래서 글을 읽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어 현재는 빈터에 모암서원유허비(慕巖書院遺虛碑)와 칠현비(七賢碑)만 남아있다. 절효공께서 거니시던 모암리의 천년 노송(老松)이 지켜보는 높은 절벽아래 맑고 깊은 용소(龍沼)는 지금도 신비한 감흥을 불러 일으키며 절효공께서 후학을 가르치던 초당(草堂)터는 선생의 높은 덕을 흠모케 하는 절효선생초당유허비(節孝先生草堂遺虛碑)만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