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구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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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취당(金溝聚黨)

금구취당’은 1893년 3월 21일(음력) 이전에 이뤄지고 있었다. 이 시기는 보은취회가 진행되고 있던 때이다.≪일성록≫高宗 30년(1893, 癸巳) 3월 27일자 기사는 새로운 전라감사에 부임하는 金文鉉이 고종에게 辭陛하는 자리에서 나눈 대화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고종이 가로되 ‘湖南은 왕조가 일어선 터전이고 御眞을 모신 慶基殿이 있어 다른 지방과 달리 소중하고 나라 살림의 창고와도 같은 곳이다. 근래에 이르러 어찌된 까닭인지 풍속이 타락하고 인심이 간사, 교활해져 일종 동학의 무리가 창궐하여 날뛴다 하니 백성들을 안도하게 할 계책과 없애버릴 방책을 경이 판단하여 처리토록 하라.’ 文鉉이 답하기를 ‘신의 역량이 보잘 것 없어 제대로 보답하지 못할 듯하오나 이른바 비도들이 준동한다는 것은 참으로 변괴라 할 것입니다’ (중략) 고종이 이르기를 ‘말이란 한 번 두 번 옮기다 보면 터무니 없는 말을 지어내게 되는 것이니 족히 믿을 것이 못된다. 호남에서도 金溝에 가장 많다 하니 전주 감영에서 어느 정도 거리인가. 먼저 그 소굴을 격파하여 금단하고 일소하는 방도를 삼도록 하라.’ 文鉉이 답하기를 ‘30리 가량 되는 데 금구, 원평에 과연 취당하고 있다 하옵니다.


금구취당을 확인해 주는 또 다른 보고서는<討匪大略>이다. 1894년 11, 12월의 농민군 토벌기사가 주로 실린<토비대략>에는 “계사년(1893년) 4월 동학군 4, 5만 명이 일부는 湖西의 報恩 帳內에서 屯據하고 있었고 일부는 湖南의 金溝·院坪에 둔거해 있었다”0644)며 보은취회와 더불어 금구에서도 일정한 규모의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금구 원평집회에 모여든 동학교도들은 1만 명이 넘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신임 전라감사 김문현이 전주감영에 도착했을 때 軍司馬 崔永年으로부터 “금구에 운집한 東徒가 거의 만여 명이나 된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충청도 沔川에 유배돼 있던 金允植의 ‘沔陽行遣日記’에도 “또 금구 원평취당 수만 인은 장차 제물포로 直走하겠다고 聲言했다고 한다” “전라도에서는 금구 원평에서 도회하였는 데 그 괴수는 보은에 사는 黃河一·茂長접주 孫海中(孫化中의 誤記)이며, 만여 인을 거느리고 21일 도착한다는 뜻을 私通했다고 한다”며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동학교도들이 집결, 세를 과시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금구취당은 과연 누구에 의해서 주도됐으며 이들은 어떤 형태의 시위를 벌였을까. 금구취당의 주도인물은 全琫準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이다.≪日省錄≫등의 자료에 의하면 보은취회 해산 이후 ‘湖西의 徐丙鶴, 湖南의 金鳳集·서장옥(徐章玉)을 該道의 감사로 하여금 營獄에 체포 구금토록 하라’는 주모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의정부로부터 발령됐는데 ‘金鳳集’은 全琫準의 가명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김윤식의 ‘면양행견일기’, 吳知泳의 ‘東學史’ 등이 金鳳集을 ‘全哥나 全琫準으로 고쳐 기록하고 있으며, 전봉준이 ‘金鳳均’ 등 여러 가명을 실제 사용했다는 자료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동학교문측의 기록인≪侍天敎歷史≫에서도 “법소에서는 교도의 난동을 금하였다. 이것이 전봉준이 교도들을 사사로이 빼앗아서 전라도 금구 원평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며 금구취당을 전봉준이 거느리고 있던 집단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던 자료에는 금구취당이 현지에서 보인 행동들이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제 이들은 가시적인 시위를 벌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금구취당은 보은취회에 일부가 직접 참여, 일련의 급진적 행동을 보였으며 전봉준도 참여를 시도했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院坪에 모여 있되 별도의 행동은 하지 않고 보은취회 세력과 聲氣를 통하면서 보은쪽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금구취당보은취회에서 벌인 행동들은 서병학이 선무사 어윤중에 보낸 密報에서 간접 확인되고 있다. 보은취회의 주모자였던 서병학은 보은취회의 해산을 종용하는 어윤중에게 “湖南聚黨은 얼핏 보면 우리와 같지만 종류가 다르다. 통문을 돌리고 방문을 게시(發文揭榜)한 것은 모두 그들의 소행이다. 그들의 情形은 극히 수상하니 원컨대 공께서는 자세히 살피고 조사 판단하여 그들과 우리를 혼동하지 말고 玉石을 구별해 주시오”라고 했다. 이같은 徐의 ‘밀고’에 따르면 보은취회에서 내걸린 척왜양의 기치들은 지도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 금구취당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徐의 이러한 진술이 전적으로 사실이라면 금구취당은 교조인 水雲의 伸寃을 위해 계획 실행된 종교적 성향의 보은취회를 척왜양의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치집회로 변질시킨 動力으로 작용했다는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학계에서는 실제 이러한 방향의 연구가 진행돼 금구취당의 성격을 脫종교적이며 보다 투쟁적이고 정치적 지향을 지닌 세력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금구취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어 대체적으로 두 가지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첫째는 금구취회보은취회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열렸으며 척왜양과 지방관의 탐학금지 등 강한 정치적 성향을 지녔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와 함께 일련의 교조신원운동의 과정에서 전봉준이 동학지도부와는 별도의 세력을 갖추고 금구취회를 계기로 완전히 성장,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주도케 된다는 견해이다. 둘째는 금구취회가 ‘전봉준에 의해 주도된 정치성 강한 집회’라는 데는 일단 동의하되 보은취회와 성격을 완전히 분리하거나 지나치게 정치성을 부여하는 데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연구이다.

첫번째 견해에 따른 연구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의 최대 지도자인 전봉준이 어떤 경로로 고부민란에서 갑자기 지도자로 출현하고 1893년 11월 사발통문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금구취당’이라는 열쇠로 풀어 놓고 있다. 즉 김봉균이라는 가명으로 전봉준이 주도한 금구취당은 이미 1893년 2월 중순에서 2월 말 사이 서울서 척왜양방문 게시운동(이른바 괘서사건)을 전개했고 2월 말에서 3월 초까지는 전주에서 비슷한 운동(3월 1일경 전라감영문에 붙여진 榜文)을 벌였으며 3월 7일에는 서울에서 외국선교사, 상인의 축출과 지방관리의 압제와 탐학 제거를 위한 일대 정치공세를 벌이자고 선동하는 등 강도높은 척왜양 반압제운동을 전개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응집돼 늦어도 3월 초에는 내부적인 규율을 갖춘 집단으로 성립되었고 적어도 3월 중순에는 금구에서 독자적인 집회를 가질만큼 완강한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견해이다. 이처럼 전봉준을 주축으로 한 금구취당은 이른바 북접지도부와 노선을 달리하면서 투쟁의식을 강화해 동학농민전쟁의 주도세력으로서의 잠재력을 갖춰 나갔다는 것이다.

이같은 논증은 탁월하고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으나 신진학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몇가지 반론에 부딪혀 있다. 즉, 금구취회가 비록 독자적으로 會集하고 척왜양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강하게 내세웠다고는 하나 공주-삼례-광화문-보은으로 이어지는 동학교단의 신원운동과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서울에서 벌어진 괘서사건을 금구취당의 동학교도들이 주도했고 금구취당의 總代 20명이 서울에서 운동을 벌이다 포도청에 구류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사료의 오독이거나 지나친 추리라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금구취당이 남접과 합세해 보은취회를 좀더 정치적으로 몰고 가기 위해 보은에 집단적으로 참여하려 했으나 취회가 해산해 버리자 선발대 천여 명이 忠州로 방향을 돌려 上京하려 했다’는 해석은 명백히 사료를 오독한 것이라는 반박을 받고 있다. 4월 2일 보은취회가 해산하면서 ‘사잇길로 원평에서 충주로 간 자가 천여 명’이라는 한 報恩 將吏의 보고서가 전하는데 이는 서울에서 별도 계획을 실행하려고 상경하려던 금구취당의 선발대가 아니라 보은취회에 참여했다가 충주쪽으로 돌아가던 보통의 동학교도들이었다는 것, 여기서 나오는 원평은 보통의 전라도 금구 원평이 아니라 현재 ‘忠北 報恩郡 山外面 院坪’이라는 지적이다. 또 하나는 금구에서 보은과 별도의 취회가 이뤄진 것은 단순히 참여 교도들의 식량조달의 한계 때문에 집회를 분산시킨 것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보은·금구취회는 동일한 목적 아래 분산적으로 열렸던 신원집회라며 금구취당에 대한 별도의 의미 부여를 차단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금구취당은 동학교도들이 최대 규모의 세를 과시한 보은취회의 시기에 별도로 열리고 있었다는 점과 이를 전봉준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따라서 금구취회에 관한 배경과 올바른 성격 규정은 동학농민전쟁의 전반을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연결고리인 것이다. 1893∼1894년 사건 전반에 걸친 안타까움이긴 하나 특히 금구취회에 관해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건이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고 있음은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