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익 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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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익 묘갈(徐益墓碣)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관련항목 보기에 있는 조선 중기 서익의 묘갈.

1672년(현종 13) 서익의 묘소 앞에 세워져 있는 묘갈로 서익의 행적이나 업적, 관직 등 서익 개인에 관련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후손들에 대해 자세하게 적고 있다.

육곡리에 위치한 가야곡면사무소에서 지방도 602호선을 따라 동쪽으로 500m 정도 가서 다시 남쪽으로 향하는 지방도 643호선을 따라 4㎞ 정도 더 가면 동쪽에 왕암 저수지가 보인다. 이 저수지의 동남쪽 신삼골 골짜기 끝에 부여 서씨 재실이 있으며, 재실의 북동쪽 샛길 300m 정도에 서익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 앞에 서익 묘갈이 세워져 있다. [금석문] 비의 높이 118㎝, 너비 65.5㎝, 두께 22.5㎝이며, 복련형 이수를 올린 형태로 제작되어 있다. 찬자는 이재(李縡), 서자(書者)는 서정덕(徐定德)으로, 서자인 서정덕은 묘갈의 주인공인 서익의 5대손이다.

묘갈의 앞면에는 ‘통정대부의주목사서공익지묘숙부인장수황씨부좌(通政大夫義州牧使徐公益之墓淑夫人長水黃氏祔右)라고 쓰여 있다. 뒷면에는 서익의 행적과 업적, 그리고 그의 조상과 관직 생활 등이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는 형식이다. 서익 묘갈의 서두에서는 북변(北邊) 방어 대책의 개혁을 주장한 율곡 이이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이 서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서익이 서인과 동인을 화해시키고자 노력했던 일, 정여립의 사람됨을 미리 알고 왕에게 알렸던 일 등을 서술하고 있다. 이어 서익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언급한 뒤 관직 생활을 기록하여 그의 행적을 알리고 있다. 뒷면에는 서익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비교적 자세히 정리하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서익이 당쟁을 없애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그것이 무위로 돌아갔다며 한탄하는 글로 마무리된다.

서익 묘갈을 통해 서익의 인물 됨, 그가 추구하고자 하였던 삶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묘갈의 서두에는 서익의 주요 업적을 새겼는데, 이것은 후손들이 그의 행적을 부각시켜 가문의 위상을 제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통정대부(정3품당상관품계)로 의주목사(정3품수령)를 지낸 서익과 부인 숙부인(외명부 정3품문무당상관의 아내에게 내린 작위) 장수황씨 묘(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 소재) 서익 비문에는 북변방어 대책의 개혁을 주장한 율곡이이의 뜻을 이어받은 인물이 서익이며,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을 화해시키려 노력한일 또한 정여립의 사람됨을 왕에게 알린일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야곡면 산노리에 서익을 비롯하여 양응춘, 김문기, 김성휘 등을 모셨던 효암서원이 있습니다. 1867년(고종 4)서익이 퇴위되어 6위만 모셨다가,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폐철되었고, 1925년 사우를 복원하였습니다. 효암서원은 임진왜란때소실된 가야곡면 두월리의 갈산사가 전신이며, 1713년(숙종 39) 현재의 자리인 산노리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당시 갈산사는 중화재 강응정을 모신 서원이었으나 임진왜란때 폐허가 되었던 것을 우암 송시열이 현 위치에 재건했다고 합니다.

그후 서익, 양응춘, 김문기, 김성휘, 김필태, 남준을 배향하였으나 위차(位次) 문제로 인해 서익은 1867년(고종 4) 행림서원을 건립하며 퇴위하였고, 나머지 6인을 모시게 되었다. 1867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5년 복원되었습니다.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에 있는 행림서원은 1867년(고종 4) 만죽헌 서익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서익은 산노리의 갈산사에 배향되었다가 행림서원으로 분향되었습니다.

1694년(숙종 20) 당시 논산시 가야곡면의 대표적 세거성씨인 부여서씨 인물 중 판관(判官,수령의 지휘받아 사법.행정을 담당한 종5품)을 지내고 통례원 벼슬을 지냈던 서열의 묘소 앞에 있던 비석이 오랜 시간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의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서열의 10세손  합천군수(종4품수령) 서경조가 후손들과 다시건립하고 찬(撰,지음)하고 서(書)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