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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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전40권. 정식명칭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인데, 흔히 줄여서 『고려도경』이라 부르고 있다.

책의 명칭에서 보듯이, 1123년 휘종(徽宗)의 명을 받고 사절로 고려에 와서 견문한 고려의 여러 가지 실정을 그림과 글로 설명했기 때문에 ‘도경’이라 칭하였다.

서긍은 개성에 한 달 남짓 머무르는 동안, 그의 견문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지었다.

책은 모두 28문(門)으로 나누었고, 다시 300여 항으로 세분하였다. 형상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먼저 글로써 설명하고 그림을 덧붙이는 형식을 취하였다.

서긍은 돌아가, 곧 이 책을 만들어 휘종에게 바치고 그 부본을 집안에 두었다. 휘종은 책을 보고 크게 기뻐해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을 내리고, 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로 발탁하였다.

1126년(인종 4) 금나라가 송나라의 수도 개봉(開封 : 汴京)을 함락시킬 때, 휘종에게 바친 정본이 없어졌다. 1167년(의종 21) 서긍의 조카 천(蕆)이 서긍의 집에 있던 부본에 의거해서 징강군(澂江郡)에서 간각(刊刻)하였다.

그 부본에는 그림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이 없는 도경이 되고 말았다. 이 간본은 간행의 연대·장소에 따라 ‘건도각본(乾道刻本)’ 또는 ‘징강본(澂江本)’이라고도 한다. 고려 인종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아직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청나라 때 포정박(鮑廷博)이 편찬한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에 이 책을 수록·간행하면서 비롯되었다.

포정박은 발문에서 ‘건도(建都) 3년에 간행된 송판본과 간행 연대 미상의 고려본이 있으나 볼 수가 없고, 세상에 유전하는 것은 명나라 말기의 정휴중(鄭休仲)의 중간본(重刊本 : 鄭本)뿐이다.

이 정본(鄭本)은 탈자가 수천자에 달하고, 또 착간(錯簡)으로 읽을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 간본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포정박은 자기 소장의 사본과 정본을 참합(參合), 간행하였다. 그러나 그 지부족재본도 미비한 점이 많았다. 그는 발문에서 송판본의 출현을 기다려 그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말로써 아쉬움을 표하였다.

1910년대 초 일본인들의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지부족재본을 대본으로 활인(活印)하였고, 1932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今西龍)가 『조선학총서(朝鮮學叢書)』의 하나로서 활인하였는데, 역시 지부족재본을 대본으로 하였다.

또한 건도 3년에 간행된 송판본 한 질을 소장하고 있던 중국 북경(北京)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서 1931년『천록임랑총서(天祿琳琅叢書)』 제1집의 하나로서 영인하였다.

이것은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의 합불연경도서관(哈佛燕京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다. 1970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학연구소에서 그것을 다시 영인, 널리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책은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송나라 사람으로서 고려에 관한 기사를 남긴 것으로는 오식(吳栻)의 『계림기(鷄林記)』(20권), 왕운(王雲)의 『계림지(鷄林志)』(30권),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3권) 등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완전히 없어졌거나 겨우 그 일부분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어서 『고려도경』이 가지고 있는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다른 고려사 관계자료들에서는 볼 수 없는 귀중한 기사를 많이 수록하고 있으며, 특히 고려 인종 때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사회가 중국인의 눈에 어떻게 비쳤으며, 또 어떻게 중국과 비교되고 특색지어졌는가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서술한 부분도 적지 않다. 따라서 이 자료의 이용에는 반드시 엄밀한 검토 및 비판과 취사선택이 곁들여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