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 묘

Encyves Wiki
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10월 1일 (토) 20:44 판 (새 문서: 논산군(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의 나지막한 언덕에 안온하게 자리잡고 있다. 망한 나라의 장수인 계백의 무덤이 장군이 전몰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논산군(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의 나지막한 언덕에 안온하게 자리잡고 있다. 망한 나라의 장수인 계백의 무덤이 장군이 전몰됐을 때부터 화려하게 꾸며지고 모셔지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백제의 결사대가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는 수락산 기슭에 오래 전부터 계백 장군 묘라고도 하고 백제의총이라고도 하며 또는 의로운 무덤을 흔히 일컫듯 말무덤이라고도 하는 큰 무덤이 있었으니 1965년에 백제문화되찾기 운동의 하나로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인정하여 근래에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하고 정비한 것이다. 또한 근방인 충곡리에는 충곡서원을 세워 계백 장군을 모시고 있다.

계백(階白, ?~ 660)은 백제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특히 백제가 그 최후를 맞은 때가 바로 계백 장군이 최후를 맞은 때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계백은 신라와 당군의 노도와 같은 말발굽 아래에 온몸을 던져 백제를 지켜 내려 했고, 그 때문에 백제 멸망의 처절한 역사를 이야기할 때에는 누구나 계백 장군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육로로는 탄현(대전 근처)을 넘지 말게 하고, 해로로는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서 적병을 막으라”고 한, 옥에 갇힌 장군 성충의 예언과 귀양 가서도 충언을 올린 흥수의 진언을 듣지 않고 간신들의 모함에 시기를 놓친 의자왕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백제군은 나당 연합군의 진격을 막아야 할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이미 놓쳐 버렸다. 그때 달솔의 벼슬에 있던 계백 장군은 성안을 다니며 목숨을 나라의 운명과 같이할 결사대 5천 명을 뽑았다. 최후의 저지선인 황산벌(지금의 연산)로 나아가기 전에 이미 나라의 운명을 예감하고, 적병이 몰아닥쳤을 때에 욕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게 하느니 자신의 손으로 처자를 베고 그 시신마저 적병의 손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집에 불을 놓고 전장으로 나아갔다.

황산벌 너른 들에서 정면으로 신라 5만 군사를 대적할 수는 없었다. 그는 병사들을 3군으로 나누어 장군 자신은 중군으로서 산직리 산성에 머물고 좌군은 황령산성을, 우군은 모촌리 산성을 지키게 하여 신라군이 산마루 좁은 관문을 타넘을 때에 일시에 협공함으로써 기세를 누르려는 계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공방이 붙기를 네 차례, 백제군은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적은 수로써 신라군에 대적하여도 오히려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러나 계백이 사로잡은 신라의 어린 화랑 관창을 그 기개를 높이 사 돌려 보냈다가 되돌아와 다시 잡았을 때에는 목을 잘라 말에 매달아 돌려 보냈으니, 그것이 무참히 짓밟혀 꺾여 있던 신라군의 전투욕을 불살라 마침내 백제군이 산산이 섬멸되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계백과 5천의 결사대는 황산벌에서 밀리고 밀려 마침내 부여를 지키는 최후의 저지선인 외성리 산성이 있는 수락산에서 남김없이 장렬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백제에 관한 기록조차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짤막하게 나와 있는 것이 거의 전부이니 일개 무장인 계백에 관한 것은 백제 멸망 때와 관련된 것말고는 달리 남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의 출신이나 성장 내력에 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성씨에 관해서도 본성이 왕족 부여씨라는 설도 있고, 백제 귀족으로서 8대 성의 하나인 해(解)씨 음이 잘못 전해져 계(階)씨가 되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이다. 오랜 세월이 끊긴 다음에 추정하는 것이기는 하나 구전되어 내려오는 바에 따라 묏자리가 지정되었을 뿐더러, 부여군 충화면 천등산 일대에서는 계백 장군의 출생지이며 계백성충, 흥수의 수련지로 추정되는 건물터 세 군데가 발견되기도 하여 계백에 대한 재조명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계백은 백제인으로서 자부심을 지녀 온 이 땅 사람들에게는 무너져 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선 자리에서 끝까지 자신을 지키려 애쓴 백제인의 모습으로 길이 가슴에 남을 것이다. 그가 대적했던 신라의 김유신 묘처럼 드넓은 묘역도 없고 화려한 능묘조각도 없지만 인적 드물고 조촐한 계백 장군의 묘는 삶에 대해서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한번쯤 단출하게 찾아가 삼가 옷깃을 여미고 거닐어 볼 만한 곳이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논산사거리에서 대전 방향으로 1번 국도를 따라 7.35㎞ 가면 길 왼쪽에 황산벌 휴게소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부적 농협이 있다. 부적 농협 옆으로 난 2번 군도로를 따라 2.7㎞ 들어가면 충곡2리가 나온다. 충곡2리 새마을회관 앞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300m 정도 가서 다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580m 정도 가면 계백 장군 묘 앞에 닿게 된다.

묘 입구에는 대형버스도 주차할 수 있는 공터가 있다. 논산에서 충곡2리를 지나는 버스가 하루 6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