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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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10월 1일 (토) 11:25 판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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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항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가계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원직(元稷)·무진(戊辰). 증조 할아버지는 서광수(徐廣修)이고, 할아버지는 군수 서유증(徐有曾)이며, 아버지는 영산 현감 서선보(徐善輔)이다. 어머니는 군수 김강(金鋼)의 딸이고, 부인은 이도성(李度誠)의 딸이다.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진리(徐晉履 직장)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택(徐文澤 주부)
      • 고고조할아버지: 서종집(徐宗集 목사)
        • 고조할아버지: 서명관(徐命寬 음관)
          • 증조할아버지: 서광수(徐廣修 군수)
            • 할아버지: 서유증(徐有曾 군수)
              • 아버지: 서선보(徐善輔 군수)
                • 본인: 서경순(徐璟淳 이조판서 정2품)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종섭(徐宗燮 이조참의)
        • 작은고조할아버지:서명원(徐命元 사헌부집의)
          • 작은증조할아버지: 서매수(徐邁修 영의정 정1품)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명천(徐命天 대사간)
          • 작은증조할아버지: 서격수(徐格修 동중)
            • 작은할아버지: 서유영(徐有英 금계필담 저자)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종엽(徐宗燁 진사)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명인(徐命仁 도호부사)
          • 작은증조할아버지: 서미수(徐美修 대사간)
            • 작은할아버지: 서유여(徐有畬 공조판서 정2품)
              • 작은아버지: 서승보(徐承輔 형조판서 정2품) 
          • 작은증조할아버지: 서직수(徐直修 관찰사)
            • 작은할아버지: 서유문(徐有聞 이조참판 종2품)
              • 작은아버지: 서좌보(徐左輔 병조판서 정2품)
                • 사촌: 서원순(徐元淳 예조판서 정2품)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명전(徐命全 진사)
          • 작은증조할아버지: 서정수(徐鼎修 이조판서 정2품)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종급(徐宗伋 이조판서 정2품)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활동 사항

서경순(徐璟淳)[1808~?]은 1852년(철종 3) 식년시에 생원 3등 37위로 급제하고, 1867년(고종 4)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서경순이 동래 부사로 나갔을 때 일본은 혼란과 변혁이 뒤섞인 막부 시대의 말기였다. 조선은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1866]를 겪은 직후로, 근해에 서양 배들이 자주 나타나는 등 외부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일본도 호시탐탐 조선의 정세를 살폈는데, 많은 일본 배들이 표류를 가장하여 부산 왜관에 들어왔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서경순의 활동에 대한 기록을 『일성록(日省錄)』 1867년 10월 1일자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년[1866] 12월 중국 광저우[廣州]의 『중외 신문(中外新聞)』에 팔호순숙(八戶順淑)이라는 사람이 ‘일본 막부가 조선 침략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기사가 실려 그 내용이 조선에까지 전해졌다. 이에 서경순은 1867년 3월 예조 판서 이연응(李沇應)의 이름으로 진위를 따지는 서계를 보내어 5월 일본 막부에 전달하게 하였다. 이에 일본 막부는 그것은 근거 없는 망언이며 부설[떠도는 말]임을 해명하는 회답 서한을 8월에 조선에 보내었는데, 그 서계는 10월 1일 후임 동래 부사 정현덕에 의해 조선 조정에 전달되었다.

한편 1867년 3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는 무역 규정의 개정과 막부의 사절 파견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강신대차사(講信大差使)로 니이마 고이치로[仁位孫一郞][平和復, 쓰시마 도주의 가노(家老)]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는 막부가 조선과의 직접 외교 방침을 천명한 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무기를 교역하는 일과 역관을 통하지 않고 바로 동래 부사와 상대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6월 13일 훈도 안동준과 별차 현덕민을 부임시켰고, 6월 18일에는 동래 부사 정현덕을 새로 부임시켜 본격적인 접대에 임하게 하였다. 8월 대차사 접위관 홍문관 교리 홍원식, 당상 차비관 오치양 등이 파견되어 접대를 하였으나, 사절단의 주장은 10월 정식으로 거절되었다.

학문과 저술

서경순의 장계를 모은 『동래부 계록(東萊府啓錄)』 제5책[1867년 1~9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