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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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말 서광범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겨우 3일만에 실패했고 서광범은 주동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와 변복하고 인천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 집에 은신하였다가 겨우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시대의 한계상 갑신정변 실패 후 서광범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아버지 서상익은 한성부 감옥에 투옥되어 8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굶어 죽었고 아내 역시 10년 간 투옥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가족들 역시 모두 처형당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전제 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그러므로 홍영식과 100년 뒤에 태어난 홍준표는 서로 같은 항렬이다.], 박영효(반남 박씨)의 '영(泳)'자 항렬은 '승(勝)'[* 이건 근거없는 풍문으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는 이때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갑신정변(1884년)이 발생한지 약 60년 전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으며 박영효의 집안인 오창공파 금양위 분서공 박미(朴瀰)의 자손들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泳자 항렬을 사용했다.], 서광범(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그 뒤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서광범을 죽이려고 일본에 암살자를 파견했고 조선 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기감을 느낀 서광범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안전했는데 뉴욕, 뉴저지 주 및 워싱턴 D.C. 등을 전전해 주로 미국 동부 지역에 거주하면서 사탕수수 농장, 커피 농장, 오렌지 농장에서 잡역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서재필도 비슷한 시기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 연방 정부의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때 그는 미국 정부 기관지와 일반 잡지에 조선 교육론(Education in Korea)과 조선 민담(Korean Stories)을 게재해 발표하였다.

1894년 인사 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이때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 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 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