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종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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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이천(利川)이며, 자는 응호(應鎬), 본명은 채열(彩烈), 초명은 종채(鍾採), 별명은 응오(應五) 또는 종주(鍾珠)이다. 1881년 10월 15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백양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상필(徐相苾)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다.


서종채는 어려서부터 의절(儀節)과 재덕(才德)을 겸비하였고, 특히 의술에 뛰어났다. 1907년 7월 40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기삼연(奇參衍) 의진(義陣)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광주 서탑등(西塔嶝)에서 일본군의 토벌대에게 피살당하자 소속을 이대국(李大局)의 의병 부대로 옮겨서, 부하 25명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무장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이대국이 전사하자 서종채는 의병장이 되어 140여 명의 의병들을 인솔하고 전라도의 함평·영광·무장·부안·고창 등을 거점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함평군 성문·담양군 추월산·무장면 고산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부안군 청일리에서는 의병에게 적대 행위를 하던 밀고자 최용태(崔容台)를 총살하였다. 교전 중에 부상을 입은 부하들을 직접 치료하였으며, 희생당한 부하들의 가족을 보살펴 주는 등 인간적인 면모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1909년 10월 부안군 산내면의 지지포에서 악랄한 일본인 마에다[前田熊吉]를 체포하여 격포 해안에서 참살하는 등 다량의 화약과 총기를 가지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며 군자금의 조달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911년 이후 일본군 수비대가 증원되고 토벌 작전이 강화되자 의병의 희생을 염려하여 해산령을 내리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다 일본군에 붙잡혔다.

1913년 7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5년형을 언도 받고 불복, 상고했으나 1913년 7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 징역을 언도받았다. 그 뒤 1914년 칙령에 의해 징역 20년으로 형이 변경되었으며, 1915년에는 다시 15년으로 감형되었으나 이듬해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