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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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을 타파한 서련(徐憐) 판관​

서련(徐憐) 판관은 김녕사굴(金寧蛇窟) 일화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제주도와 연관된 서씨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입도조 서희례(徐希禮)보다 4대를 앞서는 인물이다.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19세 손이며 연산(連山)을 관(貫)으로 한 연성군(連城君) 서준영(徐俊英)으로부터는 5세 손이 된다. 그는 성종 25년(1494)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천성이 총명하였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다.

부모 없이 자람을 가엽게 여긴 외조부 양경공(良敬公) 정문형(鄭文炯)은 그의 이름을 련(憐 : 불쌍히 여길 련)이라 짓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가르쳤다. 외조부 슬하에서 학문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낸 서련은 중종 6년(1511)에 18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어 중종 8년에 제주 목판관(牧判官)으로 임명되어 도임(到任)했는데 그는 역대 판관 중 가장 연소자로 알려진다.

그 무렵 제주의 구좌(舊左) 지방에는 미신에 얽매인 해괴한 폐습이 있었다.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김녕사굴(蛇窟)에는 속칭 「대맹」이라는 큰 뱀이 숨어 살아, 해마다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15~16세 되는 청순한 처녀를 제물(祭物)로 바쳐오고 있었다. 만약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뱀이 조화를 일으켜 큰 바람을 불게하여 모처럼의 농사가 폐작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윤번제로 집집마다 사굴(蛇窟)에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했기 때문에 딸을 가진 집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이 같은 폐습은 관아(官衙)에서도 알게되어 전임 관원(官員)인 이필희(李必希)가 인명을 희생시키는 일을 삼가도록 극구 만류했으나 뿌리 박힌 미신 탓인지 주민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부임 후 이런 사정을 듣게 된 서련은 "아무리 무지(無知)한 백성이라 하나 귀중한 인명(人命)을 뱀에게 바친다니 될 말이냐."고 통탄하명서 잔인무도한 악습(惡習)을 뿌리뽑겠다고 나섰다.

중종 10년(1515), 그는 주민들에게 전과 같이 제(祭)를 올리도록 한 후 병졸 수십 명으로 하여금 창칼을 지니고 숯과 염초(焰硝 : 충격으로 열을 발생시켜 폭발시키는 물질)를 준비하여 굴 입구에 대기시켰다. 북을 치자 과연 큰 구렁이가 굴 밖으로 나와 소녀를 삼키려 하였다. 이 때를 기다려 서련이 들고 있던 창으로 뱀을 향해 내리 찌르자, 병졸들과 역사(力士)들도 일거에 도끼와 창으로 사정없이 난자(亂刺)하였다. 이와 동시에 독약과 기름을 꿈틀대는 뱀의 몸뚱이에 퍼붓고 불을 당기자 오랫동안 주민을 괴롭혀 온 뱀은 드디어 타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청년 판관 서련(徐憐)을 존경하고 추앙하는 소리가 전도에 날로 높았다. 그러나 인걸(人傑)은 단명(短命)하는 것인지 중종 10년(1515) 4월 10일, 겨우 22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순직하니 그를 애도하는 도민의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한다. 일설(一說)에 는 서련이 뱀을 죽인 뒤 말을 타서 성안(城內)으로 달려오는데 등뒤에서 한줄기 붉은 요괴가 구름을 타고 따랐으며, 그가 관아(官衙)에 도달하자마자 쓰러져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더니 10여일 후에 기어이 관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서련 판관은 충남 홍성군 보개산(寶蓋山) 덕은(德隱) 땅에 안장되었다. 그의 관구(棺柩)가 제주를 떠날 때에 도민들은 이를 붙들며 애절한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한다. 미신이 만연했던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서련 판관의 대담무쌍한 행동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폐습을 퇴치하려는 살신구민(殺身救民)의 지성(至誠)과 선정(善政)을 베풀려는 호연한 용기와 의지가 있음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김석익(金錫翼)은 「탐라기년(耽羅紀年)」에서 서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서련(徐憐)이 연소(年少)했기 때문에 기질과 태도가 거칠고 경솔하여 비록 당나라의 한유(閒遊)가 종용(慫慂)의 악어를 길들인 고사(故事)에는 비길 수 없으나, 그 굳세고 올바른 기질과 백성들의 재해(災害)를 제거해 준 공(功)을 우러러 볼 때 중국 광동(廣東)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제주 사람은 마땅히 한시라도 서련의 공적을 잊어서는 아니될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오늘날 그의 공을 알아주는 이가 드므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서련이 재임시 제주 목사(牧使)는 성수재(成秀才)였는데 그는 청렴정대(淸廉正大)하고 과묵엄숙(寡默嚴肅)하였으므로 아전(衙前)들이 감히 부정을 저지르지 못했던 선정관(善政官)이었으며 그 또한 재임 중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녕사굴에 얽힌 서련 판관의 유덕(遺德)을 기리고자 1942년에는 구좌읍 하도리의 유지 동은(東隱) 강공칠(康共七) 선생이 앞장서 김녕사굴 앞에 서련을 추모하는 조그만 공덕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서련 판관의 행적은 조금씩 잊혀져 전설처럼 되어가고 공덕비마저 노후되었다. 그러자 이천 서씨 제주문중회가 중심이 되어 1972년 4월 10일에 다시금 그의 용기와 슬기를 기리는 사적비(事跡碑)를 세웠으니 그의 치적은 천세(千歲) 만대(萬代)에 영원히 기억되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