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순

Encyves Wiki
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8월 9일 (화) 18:28 판 (가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정의

개항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원직(元稷)·무진(戊辰). 증조 할아버지는 서광수(徐廣修)이고, 할아버지는 군수 서유증(徐有曾)이며, 아버지는 영산 현감 서선보(徐善輔)이다. 어머니는 군수 김강(金鋼)의 딸이고, 부인은 이도성(李度誠)의 딸이다.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1]] [[https://open.kakao.com/o/gBQB1q6c

활동 사항

서경순(徐璟淳)[1808~?]은 1852년(철종 3) 식년시에 생원 3등 37위로 급제하고, 1867년(고종 4)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서경순이 동래 부사로 나갔을 때 일본은 혼란과 변혁이 뒤섞인 막부 시대의 말기였다. 조선은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1866]를 겪은 직후로, 근해에 서양 배들이 자주 나타나는 등 외부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일본도 호시탐탐 조선의 정세를 살폈는데, 많은 일본 배들이 표류를 가장하여 부산 왜관에 들어왔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서경순의 활동에 대한 기록을 『일성록(日省錄)』 1867년 10월 1일자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년[1866] 12월 중국 광저우[廣州]의 『중외 신문(中外新聞)』에 팔호순숙(八戶順淑)이라는 사람이 ‘일본 막부가 조선 침략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기사가 실려 그 내용이 조선에까지 전해졌다. 이에 서경순은 1867년 3월 예조 판서 이연응(李沇應)의 이름으로 진위를 따지는 서계를 보내어 5월 일본 막부에 전달하게 하였다. 이에 일본 막부는 그것은 근거 없는 망언이며 부설[떠도는 말]임을 해명하는 회답 서한을 8월에 조선에 보내었는데, 그 서계는 10월 1일 후임 동래 부사 정현덕에 의해 조선 조정에 전달되었다.

한편 1867년 3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는 무역 규정의 개정과 막부의 사절 파견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강신대차사(講信大差使)로 니이마 고이치로[仁位孫一郞][平和復, 쓰시마 도주의 가노(家老)]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는 막부가 조선과의 직접 외교 방침을 천명한 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무기를 교역하는 일과 역관을 통하지 않고 바로 동래 부사와 상대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6월 13일 훈도 안동준과 별차 현덕민을 부임시켰고, 6월 18일에는 동래 부사 정현덕을 새로 부임시켜 본격적인 접대에 임하게 하였다. 8월 대차사 접위관 홍문관 교리 홍원식, 당상 차비관 오치양 등이 파견되어 접대를 하였으나, 사절단의 주장은 10월 정식으로 거절되었다.

학문과 저술

서경순의 장계를 모은 『동래부 계록(東萊府啓錄)』 제5책[1867년 1~9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