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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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형조참판,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만죽헌(萬竹軒) 서익(徐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용갑(徐龍甲)이고, 아버지는 서운기(徐雲驥)이다. 어머니는 이택민(李澤民)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김집(金集)과 정홍명(鄭弘溟)에게 수학하였다. 1643년(인조 21)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사옹원봉사가 되었으며, 1648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관을 거쳐 예문관검열과 설서(說書)를 역임하고 1654년(효종 5)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 뒤 사간원헌납·이조좌랑·평안도어사를 거쳤다.

1656년 수찬을 비롯,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이조정랑 등을 지내다 충청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서원의 폐단을 보고하고 그 개혁을 청하였다. 1658년 대사간과 승지를 거쳐 전남도감사가 되었을 때, 대동법(大同法) 시행에 찬동하여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을 반포하였다. 또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왕대비의 삭선(朔膳)을 감할 것을 청했다가 추고되었다.

1659년 진휼을 위해 속미(贖米)를 받고 중죄인을 석방했다가 파직당하였다. 현종 초년 병조참의·승지·대사성·예조참의·이조참의 등을 거쳐, 1663년(현종 4) 대사간·승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목면 재배를 권장하고 구휼 사업에 힘쓰기도 하였다. 특히 육진혁막제조(六鎭革瘼諸條)를 올려 그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는 데 앞장섰다.

1663년 11월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수찬 김만균(金萬均)은 현종을 배종하여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병자호란 당시 그의 할머니가 강화도에서 순절했다는 이유로 배종할 수 없다며 사직을 요청하였다. 서필원은 이 문제에 대해 사적인 정보다 공의(公義)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김만균의 사직을 불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김만균을 불충(不忠)이라는 이유로 파직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 듯하였지만 이듬해 송시열이 사의(私義)를 강조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공의·사의 논쟁으로 격화되었다. 결국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山黨) 계열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서필원은 일시 파직되기도 하였다.

1665년에 강화유수가 되었고 그 뒤 형조참판, 1669년 형조판서를 거쳐 1671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그 해 죽었다. 민생을 구휼하고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실질적인 사업을 많이 하였다. 왕에게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이 나서 그 시대 이상진(李尙眞) 등과 함께 오직(五直)이라 불렸다. 시호는 정의(貞毅)이다.

저서로는 『육곡유고(六谷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