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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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8월 8일 (월) 15:09 판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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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대사간, 함경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1]] [[2]]

개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온숙(溫叔), 호는 인재(訒齋) 또는 학서(鶴西). 제조 서경주(徐景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정리(徐貞履)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서문유(徐文)이며, 어머니는 이상연(李尙淵)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5년(영조 1)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28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제수받은 뒤 이조좌랑·경연검토관·대사성·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733년 이조참의가 되어 당시 정치의 폐단 10개조를 들어 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즉, 국가운영의 원칙을 세우고, 기강을 바로잡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고, 정직한 관리를 표창하며, 인재를 뽑아 쓰고, 불쌍한 백성들을 구제하며, 국방에 힘쓰고, 재정을 잘 관리하여 쓸데없는 낭비를 줄일 것을 역설하였다.

그 뒤 병조참지·전라도관찰사·대사간·함경도관찰사·대사헌 등을 거쳐 1739년에는 진위겸사은부사(陳慰兼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40년 평안도관찰사, 다음 해 예조·이조판서, 우참찬이 되었고 1742년에는 사정당상(査正堂上)이 되어 훈신(勳臣)의 후손은 9대까지 군역을 면제할 것을 결정하였다.

1745년 호조판서 재임 중에 죽었다. 영조는 서종욱의 죽음을 애도하고 충후관대(忠厚寬大: 충성스럽고 후덕하면서 관대함)한 인물이라 평하고, 무신란을 예견한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1748년 문민(文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