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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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크도다! 신대왕의 덕택이!"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 >신대왕이 선정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사면령을 내리자 사람들이 기뻐 손뼉을 치며 외친 말. 고구려의 제8대 국왕. 휘는 백고 혹은 백구.

태조대왕차대왕의 관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의 막냇동생으로, 정사 《삼국지》에는 태조대왕 궁의 아들로, 《후한서》에는 태조대왕 궁의 손자이자 차대왕 수성의 아들로 나온다. 이에 대한 현재 학계의 정설은 노태돈 교수의 지적대로 태조대왕의 먼 방계쯤 된다는 것이다.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이라면 설령 적자가 아닌 서자라더라도 후일 고구려인들이 굳이 아들을 동생으로 고칠 이유가 없는 데다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조 후반부와 차대왕 조의 기사들은 지나칠 정도로 차대왕을 깎아내리고 있다. 따라서 신대왕은 아예 태조대왕의 직계 혈통이 아니며, 신대왕의 후손인 뒷 시기의 고구려 왕들이 자신들의 선조인 신대왕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동생으로 삽입하고, 태조대왕의 사망년도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늦추며 태조대왕 조 후반부에 장장 23년에 걸쳐 차대왕의 찬탈을 서술함으로써 차대왕을 깎아내렸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보다 수백 년 앞선 중국 기록인 《후한서》에서는 태조대왕이 121년에 사망하고 뒤이어 수성이 즉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에 여러모로 《삼국사기》의 정확도가 의심된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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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gold 등극한 고추가 재사의 아들}}} || ||<:><black> {{{#gold 6대}}} ||<:><black> {{{#gold 7대}}} ||<:><black> {{{#gold 8대}}} || ||<(><white> 태조대왕(太祖大王) ||<(><white> 차대왕(次大王) ||<(><white> 신대왕(新大王) || 《삼국사기》에 따르면, 차대왕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정적 제거에만 몰두하는 등 폭정을 일삼자 명림답부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그의 동생인 고백고를 임금으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신대왕이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대왕이 죽고 차대왕이 즉위한 시점은 《삼국사기》의 146년보다 25년 이른 121년이다. 이에 따르면 차대왕의 재위 기간은 121년부터 165년까지 총 45년이 되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대왕 세력이 어떤 이유로 차대왕의 재위 기간 중 약 24년을 태조대왕의 것으로 조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여러 나이 차를 감안한다면 차대왕의 출생연도는 113년쯤으로 추정되며, 신대왕은 차대왕의 아우가 아니라 차대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낳은 아들로 보인다. 《삼국유사》 <왕력>에 '을사년(165년) 국조왕(태조왕)의 나이가 109세였는데 두 선왕(태조왕·차대왕)이 모두 신대왕에게 시해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차대왕 시기에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가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고 나서 그를 안심시킨 후 왕위에 올렸다고 한다. 아무래도 아버지(혹은 형, 혹은 삼촌) 차대왕에게 미움을 산 듯하다. 왕위에 오른 나이가 《삼국사기》에서는 77세로 나오며 형 또는 아버지인 차대왕처럼 고령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신대왕 시기 정치의 대부분은 국상에 오른 명림답부가 처리했는데, 왕은 명림답부를 신뢰했으며 그가 명재상이라 신대왕의 치세는 대체로 평안했던 것으로 사서는 기록한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의 고구려는 신대왕의 친정 체제로 돌입했으나 기록에는 특별한 정치적인 치적이 없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도 당시 고구려의 좌보와 우보를 합쳐 최고 관직인 국상을 만든 걸 보면 후대에 끼친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듯하다. 재위 도중 후한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는데 그것이 좌원 전투이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 신대왕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승하하였고, 이후 장남 고남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기록이 남겨진 아들이 4명이나 되고 그중에 2명이 왕이 되었지만 장자 계승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형제 간에 골육상쟁이 있었다.

삼국사기 기록

[include(틀:삼국사기)] [신대왕 본기] 一年冬十月 신대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대사면을 행하고 명림답부국상으로 삼다. 三年秋九月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三年冬十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 현도에 속하기를 청하다. 五年 현도 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을 정벌하다. 八年冬十一月 명림답부의 계책으로 후한의 군대를 물리치다. 十二年春一月 신하들이 태자 책립을 건의하다. 十二年春三月 남무를 태자로 삼다. 十四年冬十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秋九月 국상 명림답부가 죽다.

十五年冬十二月 신대왕이 붕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