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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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가, 개화파 사상가이다.

생애

갑신정변 이전

1859년 11월 8일 평안감사 사택[* 당시 평안감사 사택은 평안도의 중심지였던 평양에 있었다.]에서 이조참판을 지냈던 서상익과 생원 박제완의 딸 반남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광범의 증조부는 정조 때의 문관이자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徐龍輔)이다.[* 정약용의 앞날을 끈질기게 방해했던 인물이다.]

소년기에 안동 김씨 김병지[* 세도가였던 김조순의 손자이자 김조순의 차남 김원근의 아들.]의 딸과 결혼했으나 부인이 요절하면서 광산 김씨재혼하였다. 첫 부인이 안동 김씨였던지는 몰라도 일찍부터 김옥균과 가까이 지냈으며 외가 친척박규수의 집을 함께 출입하게 되면서 동시에 오경석, 유홍기 등의 통상 개화론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1882년 박영효, 서재필, 김옥균, 홍영식 등과 개화당을 조직했다.

1880년(고종 1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해 규장각 대교·검교, 홍문관 부수찬·홍문관 부응교, 세자 시강원 사서·세자 시강원 사서 겸 필선 남학 교수(南學敎授), 부응교 등을 지냈다. 1882년 4월 김옥균을 수행하여 일본 도쿄로 건너갔는데 김옥균과 함께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였고 7월에 임오군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으며 8월에 참찬관으로 임명되었다. 1882년 9월에는 임오군란 뒤 일본 정부에 대한 배상금 청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영효가 일본 수신사로 파견되자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선진 문물을 견학하였다. 이때 박영효의 권고로 수신사 일행이 귀국할 때 잔류해 별도의 시찰단 일원으로 파견되었던 김옥균과 함께 남아 일본을 돌아보고 1883년 3월에 귀국하였다.

1883년 규장각대교(待敎)에 임명되고 경연 시독관을 겸하였다. 보빙사(報聘使)가 최초로 미국에 파견될 때 보빙 전권 대사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함께 미국에 갔고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와도 면담하였다. 이후 미국의 주요 도시를 시찰하였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후 1884년 1년여 만에 귀국하였다. 이후 당연하게도 서양의 선진 문물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여러 차례의 외유를 통해 개화와 자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884년 7월에 승정원 동부승지와 내무참의(內務參議), 8월에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병조참의,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갑신정변

1884년 말 서광범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겨우 3일만에 실패했고 서광범은 주동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와 변복하고 인천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 집에 은신하였다가 겨우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시대의 한계상 갑신정변 실패 후 서광범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아버지 서상익은 한성부 감옥에 투옥되어 8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굶어 죽었고 아내 역시 10년 간 투옥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가족들 역시 모두 처형당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전제 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그러므로 홍영식과 100년 뒤에 태어난 홍준표는 서로 같은 항렬이다.], 박영효(반남 박씨)의 '영(泳)'자 항렬은 '승(勝)'[* 이건 근거없는 풍문으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는 이때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갑신정변(1884년)이 발생한지 약 60년 전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으며 박영효의 집안인 오창공파 금양위 분서공 박미(朴瀰)의 자손들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泳자 항렬을 사용했다.], 서광범(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그 뒤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서광범을 죽이려고 일본에 암살자를 파견했고 조선 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기감을 느낀 서광범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안전했는데 뉴욕, 뉴저지 주 및 워싱턴 D.C. 등을 전전해 주로 미국 동부 지역에 거주하면서 사탕수수 농장, 커피 농장, 오렌지 농장에서 잡역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서재필도 비슷한 시기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 연방 정부의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때 그는 미국 정부 기관지와 일반 잡지에 조선 교육론(Education in Korea)과 조선 민담(Korean Stories)을 게재해 발표하였다.

1894년 인사 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이때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 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 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였다.

갑오개혁

1894년 12월 조선으로 돌아와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 법무대신으로 참여하였다. 2차 갑오개혁1895년 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특히 재판 제도 및 형벌의 개혁, 근대적 법학 교육 실시 등을 제안하였다. 박영효, 유길준, 김윤식, 김홍집과 함께 단발령을 도입하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의 재판 당시에 재판장을 맡기도 했다. 허나 이 재판에서 그는 전봉준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사실상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를 처형하라는 판결을 내린 건 선구자적인 면모가 드러난 인생을 살았던 그에게는 참으로 불합리적이다.

다만 이에 대한 쉴드를 굳이 쳐주자면, 조선은 기본적으로 전제군주제 국가이지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저항권이란 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있거나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국민에게 인정되는 권리인데, 당연히 조선 시대에는 그런 개념 따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전제 군주제 자체가 이미 민주적 기본 질서를 침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는 타이틀도 후세에 붙여진 것 뿐이고, 당시에는 그냥 수많은 반란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즉, 당시 법 체계 하에서는 전봉준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는 것. 5.18 민주화운동은 반란이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는데, 5.18 민주화 운동의 경우에는 당시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민주적 기본 질서를 파괴하려고 했기 때문에 저항권 행사 요건이 갖춰졌으므로 반란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받는 것이다. 애초에 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19세기의 동학 농민 운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만 역사를 실증학적이 아닌 해석학적으로 보자면,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는 타이틀 역시 현재엔 통용될 수 있는 말이긴 하다.

도미와 최후

1895년 제4차 김홍집 내각(1895년 10월)에서는 학부 대신에 기용되었다가, 친러, 친일 양쪽의 이해 관계에 의해 12월 11일에는 주미 특명 전권 공사로 일종의 좌천이 되었다. 이때 미국의 로노크 대학은 김규식 등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으므로, 그는 특별히 로노크 대학의 졸업식 행사에 참석했고, 대학에서도 주미국 조선 공사인 그에게 명예 법학 석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관파천(1896년 2월)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정권이 들어서자 곧 현지에서 해임되었다.

해임된 후, 당시에는 천역으로 알려진 폐병이 악화되어 회복되지 못했고, 조선으로 귀국하지도 못했다. 1896년 6월 20일엔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명되지만 돌아오지 않고 다시 미국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시민권이 있으니 망명이라기보단 걍 눌러앉았다고 봐도 될듯.

그러다 얼마 안된 1897년 7월 17일 또는 8월 미국에서 일생을 마쳤다.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고, 유골은 1898년 봄 본국으로 송환되어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리 비정동(碑井洞) 산31(현 서울 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89-10) 야산에 유교 식으로 다시 장사 지냈다. 현재는 해당위치에 서울 강남개발을 통해 음식점이 들어서있으며, 묘는 몇번의 이장끝에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198 야산에 안장되었다.

여담

비교적 일찍 요절해서 그런지 역사책에선 갑신정변 부분에서만 잠깐 언급되는 인물이다. 허나 알고 보면 현대에도 꽤나 영향력을 끼친 사람인데, 일단 조선에서 최초로 (1881년부터)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이 사람이다. 그리고 국내 최초의 성경 번역자이기도 했다.

상술했듯 1892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또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당시 유럽북미, 인도 등지에서 유행하던 신흥 종교인 신지학 협회에 귀의하기도 했다.

명성황후(드라마)에서는 박용진이 분했다. 갑신정변 당시 청군이 처들어오자 직접 칼을 들고 무쌍을 찍는 모습을 보여주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