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중
절중(折中) | |
대표명칭 | 절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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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Jeoljung |
한자 | 折中 |
생몰년 | 826(흥덕왕 1)-900(효공왕 4) |
시호 | 징효(澄曉) |
호 | 통효(通曉) |
휘 | 절중(折中) |
탑호 | 보인(寶印) |
승탑 | 영월 징효국사 부도 |
승탑비 |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
목차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징효대사 절중(澄曉大師 折中)은 826년(헌덕왕 18) 휴암(鵂嵒: 현재의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선당(先幢)은 지방의 동량[1]으로, 대대로 지방 토호였던 것으로 보인다.[2]
대사는 휘(諱)가 절중(折中), 자(字)는 ... 속성은 ...씨이며 휴암(鵂嵒) 사람이다. 조상이 모성(牟城)[3]에서 벼슬살이하다가 마침내 그곳의 군족(郡族)이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당(先幢)인데,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뛰어나서 명성이 화이(華夷)에 유명하였다. 효행과 자비로움은 역사서에 실렸고, 공로와 업적은 왕부(王府)에 간직되었으니, 고을의 귀감이 되고 마을의 동량이 되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절중의 어머니 백씨(白氏)는 한 천녀(天女)가 아름다운 보배 구슬을 건네주는 꿈을 꾸고 대사를 잉태하였다.
어머니 백씨(白氏)가 잠깐 잠이 들었을 때 한 천녀(天女)가 "아미(阿㜷)께서는 반드시 지혜 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보배를 ... 꿈을 꾸어 ... 대사(大師)를 임신하게 되었다. 보력(寶曆) 2년(826, 헌덕왕 18) 4월 7일에 탄생하시었는데, 날 때부터 성스러운 자태를 지녔고, 아이들처럼 놀지 아니하였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출가수행
832년 7세에 오관산사로 들어가 출가
일곱 살 때 선승(禪僧)이 걸식(乞食)하는 스님을 보고서 출가(出家)를 흠모하는 마음을 내게 되었다. 마침내 양친(兩親)을 하직하고서 홀로 오관산사(五冠山寺)에 가서 진전법사(珍傳法師)를 배알하였다. 법사께서 이마를 만져 주는 순간 문득 마음을 쉰다는(息心) 뜻을 깨달았으며 곧 자실(慈室)[4]에 머무르면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3-4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840년 15세에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함
844년 19세에 안성 장곡사에서 구족계를 받음
열아홉 살이 되자 백성군(白城郡: 경기도 안성)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대사(大師)가 (계(戒)를 받으려고) 계단(戒壇)에 올라가는 날에 갑자기 보랏빛 기운이 계단에서 솟아올랐다. (이를 본) 이 절의 노(老)스님이 대중들에게 "이 사미(沙彌)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닦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증험을 보인 것으로 보건대 마땅히 계주(戒珠)를 얻었을 것이다. 반드시 후대(後代)에 미혹한 중생을 인도할 사람이므로 먼저 이러한 특별한 징조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이전의 태몽(胎夢)을 돌이켜 생각하니 완연히 부합되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이후 여러 지역을 다니며 공부하다가, 중국에서 남종선(南宗禪) 계통인 마조(馬祖)의 수제자 남전(南泉)에게서 법을 받고 돌아온 도윤(道允)이 금강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입실하여 수도하였다. - 민백 장담사에 오랫동안 머물며 도윤의 선법을 충실히 계승함.
풍악(楓岳)[5] 장담사(長潭寺)에 오랫동안 중국에 가서 유학하고 귀국한 지 아직 얼마되지 않은 도윤(道允) 화상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화상이) 선을 닦고 계시는 곳으로 찾아가 오체투지[6]의 예를 올렸다. 화상께서는 "영산에서 너와 헤어진 지 벌써 몇 생(生)이나 되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었구나. 어찌 이다지도 늦게 왔는가"라고 하였다. 대사는 이미 입실을 허락받고서 스님의 자애로운 가르침에 깊이 감화되었으니 스스로 바라는 바에 맞았다. 이로부터 화상을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화상은 일찍이 중국에서 남전화상(南泉和尙)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알현하였었다. 남전(南泉)은 강서도일(江西道一)을 계승하였고, 강서(江西)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을 이었으며, 남악(南岳)은 곧 조계혜능(曹溪慧能)의 으뜸가는 제자이니, 그 고조와 증조를 가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대사(大師)는 이때부터 (도윤화상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좌우(左右)를 떠나지 아니하고, 동산(東山)의 법을 이어받게 되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4-4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그 후 도담선원으로 옮겨 역시 중국에서 선을 수학하고 돌아온 자인선사의 문하에서 16년간 수학함
그 후 곧바로 도담(道譚)선(원?)에 가서 자인(慈忍)선사를 함께 알현하였다. (대사가) 찾아뵙고 예를 드리자마자 (자인선사는) 곧바로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처럼 "만나는게 늦었다. 목을 길게 늘여 빼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중략)... 그리고 나서 16년 동안 선문에 머무르며 진리를 깊이 탐구하였다. 마침내 망언(亡言)의 경지를 밟아 득의(得意)의 마당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으니 쪽보다 더 푸르고, 붉은 빛은 꼭두서니에서 나왔지만 꼭두서니보다 더 붉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활동
882년 57세에 정부로부터 곡산사에 머물도록 요청받았지만 수도가 가깝다는 이유로 거절 대신 영월 사자산에 있던 운예선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제자들을 이끌고 사자산 흥녕선원에 주석함. 이에 왕실에서는 흥녕선원을 중사성에 소속시키고 여러 우대 조치를 베풀어 줌
중화(中和) 2년(882, 헌강왕 8)에 전(前) 국통(國統)[7]인 대법사(大法師) 위공(威公)이 대사(大師)가 머무를 곳이 없어서 부평초처럼 떠돌아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치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마음을 아파하였다. 급히 곡산사(谷山寺)를 ... 왕에게 주청(奏請)하여 주지(住持)하도록 해주었다. 간절한 마음씀에 깊이 감동하여 잠시 머무르기는 하였지만 서울(京輦)과 가까운 아쉬움이 있어서 마음에 편하지는 아니하였다. 이때 사자산(師子山)의 석운예(釋雲乂) 선사(禪師)가 대사의 덕이 중국과 우리나라에 으뜸임에도 정해진 처소가 없음을 듣고서 제자를 보내어 간절한 마음을 표하면서 "노승(老僧)이 머무르는 곳은 작은 그릇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대사께서 여기에 머무르신다면 그릇과 뚜껑이 서로 잘 맞는 것이 될 것입니다. 스님이 아니시면 누가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행차를 돌리어 사찰로 와서 머무르십시오"라고 요청하였다. 대사는 멀리서 보내온 정성을 거스를 수 없어서 보내온 뜻에 따르고자 하였다. 곧 선중(禪衆)을 이끌고 가서 그곳에 주석하였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5-4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하지만 신라 말의 혼란기에 전란이 잇따라 흥녕선원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음 886년 다시 제자들을 이끌고 상주 근처 사찰에 머무르다가, 스승인 도윤의 묘탑과 옛 동문들이 있는 쌍봉사로 감.
... 이때에 혼란스러운 운수를 당하여 시대가 힘들었고, 왕위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과 같았다. 곳곳에서 불타는 연기와 말달리는 먼지가 갑자기 일어나고, 나쁜 기운이 사찰에까지 미칠까 염려되었다. 대순(大順) 2년(891, 진성여왕 5)에 상주(尙州)의 남쪽으로 피난하여 잠시 오령(烏嶺, 鳥嶺의 착오?)에서 머물렀다. 이때에 본산(本山)은 과연 병화(兵火)를 만나 사찰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대사가 길흉(吉凶)을 미리 점치어 함께 타 죽을 재난을 면한 것이었다. ...(중략)... (대사는) 북쪽 땅을 떠나 점차 남쪽으로 움직이면서 공주(公州)를 통과하게 되었다. (공주의) 성 아래를 지나갈 때에 장사(長史) 김공휴(金公休)와 군리(郡吏) 송암(宋嵒) 등이 멀리서 자비로운 명성을 듣고서 군성(郡城)으로 맞아들이고 아울러 ... 좋은 거처를 가려 그곳에 머무르시기를 청하였다. 대사는 장사에게 "빈도(貧道)[8]는 늙어가므로 쌍봉사(雙峰寺)에 가서 직접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을 찾아보고 돌아가신 스승님의 탑에 참배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가는 것이므로 지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6-4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쌍봉사가 있는 무주에 도착한 후에는 지방 세력가 김사윤이 제공한 승주 동림사에 머무름. 다시 전란을 염려하여 강화도 은강선원으로 감.
대왕께서는 대사가 남방(南方)을 돌아다니시며 사방을 보호하심에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받들어 모시고 크게 귀의한다는 것을 들으시고, 대사가 길이 국가를 복되게 하고 아울러 나라를 지켜주시는 것을 알게 되어 특별히 무량사(無量寺)와 영신사(靈神寺)의 두 절을 정하여 머물기를 청하였다. 이 주의 여러 향리인 김사윤(金思尹) 등은 (대사의) 선지(禪旨)를 듣고 법의 은혜를 깊이 느끼고서 분령군(芬嶺郡: 전라남도 순천)의 동림사(桐林寺)를 영원히 선거(禪居)에 속하게 하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시기를 청하였다. ...(중략)... 얼마 후 대사가 대중에게 "이곳은 반드시 재해가 일어나고 도적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있을 것이다. 미리 대처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급히 북산(北山)을 가리켰다. 곧바로 서해로 배를 타고 나아갔다. ...(중략)... 이윽고 은강선원(銀江禪院)에 이르니, 마음에 조금 흡족하였다. 이에 열흘 넘게 지내면서 임시로 머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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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7-4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입적
그가 은강선원에 머물렀을 때 진성여왕은 황양현(荒壤縣, 斧壤縣이라는 설도 있음)의 부수(副守) 장연열(張連說)을 보내어 국사(國師)의 예우를 표하고 보좌를 청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었음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 민백
900년 3월 그곳에서 입적함. 나이 74세, 법랍 56세였다.
건녕(乾寧) 7년(900, 효공왕 4) 3월 9일 아침에 이르러 홀연히 문인(門人)들에게 ""삼계(三界)는 모두 공(空)이고, 만연(萬緣)은 다 같이 고요하다. 나는 이제 떠나려한다. 너희들은 힘써 정진하여 선문(禪門)을 수호하고,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않아서 나의 은혜에 보답하라"라고 말하고 말이 끝나자 앉은 채로 입멸(入滅)하였다. 세속 나이는 75세이고, 법랍은 56이었다. 이때에 하늘빛은 창망하고, 햇빛은 참담하였으며, 인간 세계는 눈을 잃고, 세상 사람들은 마음 아파하였다. 상심에 잠겼으니, 하물며 문하의 제자들이야 오죽하였겠는가. 다 같이 마음의 상례를 간절히 하고 스승과 헤어지는 것을 함께 슬퍼하였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절중 사후 문도들은 사리를 모시고 동림사로 가서 묘탑을 건립하였다.
천축(天竺) 구시(拘尸)[9]의 법을 본받아 석실(石室)의 서쪽에서 다비(茶毗)하고, 사리 1천 알을 수습하였다. 그 날 밤 이 현(縣)의 제치사(制置使)인 김견환(金堅奐)은 "석단(石壇) 위에서 보라색 기운이 하늘로 뻗치고, 천중(天衆)이 날아와서 사리를 수습하여 갔다"라고 말하였는데, 아침을 기다려 선원에 가서 그 특이한 상서를 승려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대중들이 이에 깜짝 놀라 쌍림(雙林)으로 가보니, 과연 일백여 알의 사리를 수습할 수 있었다. 천인(天人)들이 공경하고, 스님과 신도들이 애통해 하는 것이 (이와 같았따?) ... 이곳은 강가이고 현읍(縣邑) ... 안타까운 것은 사찰과의 거리가 멀고 바닷가에 치우쳐 있고, 생각건대 스님들이 성(城) 근처에 살고 있으니, 마치 제비가 천막 위에 살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사리를 모시고 동림사(桐林寺)로 가서 천우(天祐) 3년(906, 효공왕 10)에 탑을 높이 세우고 사리를 안치하였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8-49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신라 정부에 탑비의 건립을 요청함. 효공왕이 징효대사와 보인지탑이라는 시호와 탑호를 내려준 후 예부시랑 박인범에게 비문의 찬술을 명했지만, 박인범은 비문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 고려 건국 이후, 태조 왕건이 최인연에게 비문의 작성을 지시하고, 924년에 비문이 완성됨.
법을 전해 받은 제자인 여종(如宗), 홍가(弘可), 신정(神靖), 지공(智空) 등 1천여 사람들이 다 같이 쌓아 놓은 탑이 무너질까 염려되고, 사리를 모신 언덕이 들판으로 변할까 걱정되어 대궐에 표를 올려 큰 비석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아뢰었다. 효공대왕(孝恭大王)은 일찍부터 (스님의) 빛나는 풍모를 사모하고 항상 불교의 이치를 숭상하였으므로 징효대사(澄曉大師)라는 시호(諡號)와 보인지탑(寶印之塔)이라는 탑의 이름을 추증해 주시고, 이어서 한림학사로서 전(前) 예부시랑(禮部侍郞)인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시었다. 그 인범이 왕명(王命)을 겨우 받들고 아직 비문을 짓기도 전에 장수(漳水)[10] 물가에 누우니, 곧바로 장학(藏壑)을[11] 한탄하게 되었다. 이에 문인들은 (대사의) 아름다운 자취가 점차 사라지는데 비석에 새겨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열심히 정성을 다하여 (대사의) 행장(行狀)을 정리하였으니 실로 구름이 비석의 돌을 쓰다듬고 학의 울음이 대궐에 들리게 되었다. | ||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49-5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
비문의 완성 이후에도 후삼국 항쟁의 과정에서 비석이 건립되지 못하다가 944년에 비로소 절중의 문도들이 머물던 사자산 흥녕선원에 건립됨.
절중의 탑비는 본래 신라 때에 건립할 예정이었지만 후삼국의 혼란기에 비문의 찬술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여 고려가 건국한 후인 924년에 비로소 비문이 완성되었고, 944년(혜종 원년)에 건립되었다. 고려 초의 대표적 문장가로 여러 고승들의 탑비를 지은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지었으며, 최윤(崔潤)이 당시에 유행하던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楷書體)로 글씨를 쓰고, 최오규(崔奧規)가 글자를 새겼다.[12]
절중 문도의 거점이 된 흥녕선원은 충주 유씨를 비롯한 지역 세력가들의 후원을 받아 고려 초에 중창된 것으로 보이며, 사자산문의 중심사찰로 자리잡게 되었음.
- 김혜완, 「나말려초 남한강 주변의 선종사원과 선사들의 활동 -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57-292쪽.
- 박선영, "절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인재, 「충주 정토사 현휘와 영월 흥녕사 절중 - 고려 혜종대 정변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93-321쪽.
- 이일야, "사자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179-205쪽.
- 장일규, 「신라 말 고려 초 선승의 시기별 지역별 활동 추이와 산문 형성 과정」, 『신라사학회』 Vol.39, 2017, 133-163쪽.
-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5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최연식, 「사자산 선문의 성립과정에 대한 재검토」, 『불교학연구』 Vol.21, 2008, 219-257쪽.
- "절중",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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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량지재(棟梁之材). 기둥과 들보로 쓸 만한 재목이라는 뜻으로, 한 집안이나 한 나라를 떠받치는 중대한 일을 맡을 만한 인재를 이르는 말.
- ↑ 박선영, "절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지금의 강원도 금화군 금성면 지역으로 추정됨.
- ↑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로 사찰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 ↑ 풍악은 보통 금강산의 이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의 풍악은 내용상 도윤화상이 머물고 있던 전라남도 지역의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 ↑ 불교에서 행하는 큰절의 형태. "오체투지",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신라시대의 최고위 승관직
- ↑ 승려나 도사(道士)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빈도", 한국고전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석가가 입멸한 쿠시나가라를 가리킨다.
- ↑ 중국 호북성(湖北省) 당양현(當陽縣) 동북쪽을 흐르는 강이다. 이곳에서 관우(關羽)와 그 아들 관평(關平)이 죽었으니 이곳에 눕는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한다.
- ↑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영원한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비유이다.
- ↑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참고문헌
- 김혜완, 「나말려초 남한강 주변의 선종사원과 선사들의 활동 -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57-292쪽.
- 박선영, "절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인재, 「충주 정토사 현휘와 영월 흥녕사 절중 - 고려 혜종대 정변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93-321쪽.
- 이일야, "사자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179-205쪽.
-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76-307쪽.
- 장일규, 「신라 말 고려 초 선승의 시기별 지역별 활동 추이와 산문 형성 과정」, 『신라사학회』 Vol.39, 2017, 133-163쪽.
-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5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최연식, 「사자산 선문의 성립과정에 대한 재검토」, 『불교학연구』 Vol.21, 2008, 219-257쪽.
- "절중",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