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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광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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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7월 26일 (수) 17:16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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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광명사
(開城 廣明寺)
대표명칭 개성 광명사
한자 開城 廣明寺
이칭 개경 광명사
건립시기 922년



정의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에 있었던 절.

내용

922년(태조 5) 고려 태조가 자기가 살던 옛집을 희사하여 창건하였다. 담선법회(談禪法會: 선의 도리를 추구하는 모임)가 개최된 사찰로 유명하며, 이규보(李奎報)가 쓴 「광명사선회설재청설선문(廣明寺禪會說齋請說禪文)」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1] 충렬왕도 몇 차례나 이 절을 찾았고, 충숙왕·충정왕 등도 이 절을 찾아 우란분재(盂蘭盆齋)·용화회(龍華會) 등을 여는 등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공민왕은 즉위 뒤 2년(1353), 4년, 8년의 3월 24일에 충숙왕의 기신(忌晨)을 이 곳에서 베풀었으며, 가을 등에도 기재(忌齋)와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또한 공민왕 때 양종오교(兩宗五敎)공부선(功夫選)이 치러진 곳이기도 하다.[2]

조선시대에는 태조회암사(檜巖寺)에 역병이 돌자 왕사(王師)무학자초(無學自超)를 광명사에 머물게 하였다. 정종 대에는 태조가 직접 광명사에서 신덕왕후 강씨의 기일재를 베풀기도 했다. 태종 대에는 모후인 신의왕후 한씨의 진영을 광명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세종 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으며, 명나라의 사신이 개성에 머물면서 광명사를 구경하였고 태조의 진영을 모신 목청전(穆淸殿)에 참배하기도 하였다.[3]

혜소(慧炤)·탄연(坦然)·지인(之印)·지겸(志謙)·일연(一然)·혜근(惠勤)·보우(普愚) 등이 머물렀다고 한다.[4]

광명사 우물

최충헌(崔忠獻)은 왕이 달애정(炟艾井, 개성 북쪽에 있었던 우물)의 물을 마시면 환관이 권세를 부리게 된다는 속세의 말을 듣고, 달아정을 허물고 광명사의 우물 물을 어수(御水)로 쓰게 하였다고 한다.

Quote-left.png 달애정(炟艾井)

부 북쪽 5리에 있다.

○ 고려 신종(神宗) 초에 최충헌(崔忠獻)이 아뢰어 내시 민식(閔湜) 등 70여 명을 내쫓았다. 민간에서 전하는 말이, 임금이 달애 우물 물을 마시면 환자(宦者)가 권력을 쥔다고 하므로 달애정을 헐고 광명사(廣明寺) 우물 물을 어수(御水)로 삼았다. 속담에 등리(藤梨)를 달애(炟艾)라고 한다.

Quote-right.png
출처: "개성부 상(開城府 上)",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권 개성부 상(開城府上),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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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주석

  1. 김상현, "광명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광명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김용태, "광명사(廣明寺)",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광명사",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