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병인양요(丙寅洋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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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병인양요(丙寅洋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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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날짜 | 1866 ~ 1872 |
관련장소 | 강화도, 문수산성, 정족산성, 양화진 |
개관
조선(朝鮮) 고종(高宗) 3년 병인(1866)년 부터 1872년 까지 천주(天主) 교도(敎徒)를 추 천 명을 박해(迫害)한 사건(事件). 이 박해 때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프랑스선교사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3명 중, 리델(Ridel)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내침,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러시아로부터 통상(通商) 요청(要請)을 받았을 때, 대원군(大院君)이 천주교(天主敎)를 이용(利用)하여 프랑스의 힘을 빌려 하다가, 뜻대로 안 되자 서양(西洋) 학문(學問) 배척(排斥)의 명을 내리고, 교도(敎徒)인 남 종삼, 홍 봉주 등(等)과 프랑스 선교사(宣敎師) 베르네 등(等)을 죽이고 팔도에 영을 내려 교도(敎徒)를 학살(虐殺)했음. 이로 말미암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다.
프랑스 공사 벨로네(Bellonett, H.D., 伯洛內)는 사전에 청국의 승인을 받고 조선이 병인박해를 단행하였으므로 ‘병인사옥의 공범자’라고 청국 정부를 규탄하였다. 조선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로즈제독에게 응징 원정을 결행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청국은 조선은 중국의 조공국(朝貢國)이지만 정치적으로 독립국가이며, 공범 사실은 사실 무근이라고 하면서 거병(擧兵)을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 관계가 없다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국가라는 점 등을 들어 프랑스정부의 직접 개입 없이 현지 사령관인 로즈의 주재 하에 군사적 응징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병인양요 [丙寅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클래스
- 사건
관련 문서
이 문서 | 관계 |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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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 | A는 적의 허를 찌르는 전략으로 B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군을 강화도에서 철수시켰다. | 정족산성 |
병인양요 | A는 B의 침략을 조선 최초로 방어했다는 의미가 있다. | 서구 제국주의 |
기여
- 장원석: 처음 작성
출처
- ↑ 병인양요 [丙寅洋擾, [네이버 지식백과] 병인양요 [丙寅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