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일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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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일 묘(徐東日墓)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 570[망우동 산57-1]

합장묘로 묘표의 이름은 부인 최옥경이 써있다. 묘지번호는 107266이다.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있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서동일의 묘.

개설

서동일(徐東日)[1893~1966]의 호는 춘파(春波)이다. 1923년 1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남형우(南亨祐), 배천택(裵千澤)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조직한 국민당에 가입하여 재정 부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 1월 국민당으로부터 군자금 모집 밀명을 받고 귀국하여 경상북도 대구 일대에서 군자금 1,300여 원을 모집하여 2월경 베이징에 전달하였다. 1925년 1월에 재차 남형우의 명을 받고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다. 또 1925년 4월에는 무언실행(無言實行)을 행동 지침으로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다물단(多勿團)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혔다. 서동일은 1926년 3월 31일에 대구 지방 법원에서 이른바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공갈죄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위치

서동일 묘는 망우 공원묘지 관리 사무소를 지나 오른쪽 순환로에서 서동일 연보비를 지나면 있다. 부인인 최옥경과 서동일이 합장되어 있다[묘지 번호 107266].

변천

서동일 묘는 1966년 4월 26일에 조성되었다.

형태

서동일 묘는 토분 형태로 조성되어 있고, 부인 최옥경 이름으로 된 합장묘이며 비석도 최옥경의 비석이 서 있다. 묘의 입구에는 독립운동가의 어록과 약력을 표시하는 연보비가 있다.

금석문

연보비 앞면에는 '서동일 선생(1893~1966 독립운동 ) 다물(多勿)이란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으로 용감(勇敢), 전진(前進), 쾌단(快斷) 등의 뜻과 함께 불언실행(不言實行)을 의미한다. 「다물단」의 의미'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1893년 경북 경산군 자인면 서부동에서 출생. 1923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 군대 양성 등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당」에 가입하여 재정부장으로 활동, 1924년 「국민당」의 밀명으로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 등 활동, 1925년 국민당이 일제 주구의 처단 등 보다 직접적 행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항일 비밀 결사 「다물단」에 가입하여 다물단 선언서 등을 휴대하고 거듭 귀국. 군자금 모집 등 활동을 하다 피체, 징역 3년형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라고 쓰여 있다.

현황

서동일의 묘는 원래 부인인 최옥경의 묘였으나, 1995년 서동일의 묘를 이장하여 합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