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일보

Encyves Wiki
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4년 2월 2일 (금) 16:47 판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

이동: 둘러보기, 검색

4월혁명을 맞아 귀국한 조용수는 사회대중당으로 경북 청송에서 7·29총선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서상일·윤길중·고정훈·김달호·이동화·송지영·이종률·안신규 등 혁신계 및 진보적 인사들과 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신문은 4대 사시를 내걸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미국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일이었다. 국내는 계엄령과 중앙정보부, 반공법 제정 등으로 다스리면 되는데 문제는 미국이었다. 그는 군에서 오랫동안 정보업무에 종사했기에 한국 정치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훤히 꿰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은 과거 좌익에서 활동을 했던 전력이 있었다.

박정희는 민주당 정부 각료와, 군부의 이른바 반혁명세력 그리고 혁신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구속했다. 민주당 각료들과 군부내 라이벌을 제거한 것은 이들의 재기를 막기 위한 조처였지만, 혁신계의 일망타진은 다분히 미국을 겨냥한 처사였다. '쿠데타공약' 제1항에 '반공국시'를 내건 것도 박정희의 좌익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박정희 군부는 5월 16일 거사 직후부터 혁신계 인사들의 체포작전에 돌입하여 19일에는 '용공분자 930명', 22일에는 '용공분자 2천 14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미 국무성은 그때에야 "한국의 사태는 고무적"이라며 쿠데타에 사실상의 지지를 표명했다. 미국의 지지에 고무된 쿠데타측은 이어서 4천여 명에 이르는 혁신계 인사들을 검거했다고 '전과'를 속속 발표했다. 그럴수록 미국의 신뢰는 도타워져갔다.

쿠데타 세력이 구속한 5천여 명 중에는 진짜 간첩이나 용공분자가 섞여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4월혁명 공간에서 진보·혁신의 기치를 내걸고 활동을 했거나 과거 남북협상 또는 평화통일운동 계열의 인사들이었다. 6·25 전쟁기에 용케 살아남은 보도연맹 관계자들도 포함되었다.

박정희는 미국도 놀랄 수준의 '빨갱이 사냥'으로 미국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진짜 빨갱이를 때려잡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을 빨갱이로 때려잡는다면 더욱 좋은 일이었다.

순전히 박정희의 빨갱이 경력을 세탁시켜주는 용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해야만 했다. 그 어이없는 게임의 최대 희생자 중 한 사람이 바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였다.(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 1960년대 편 1권>)

박정희 군부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를 구속하고, 결국 사형까지 집행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하나는 물론 미국에 보이기 위한 희생양이고, 다음은 언론인들에게 공포·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의도였다.

이승만 시대에 잔뜩 움츠렸던 언론이 4월혁명에 무임승차하면서 기세를 올리고, 자유화 바람을 타고 유명 무명의 각종 언론사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여 사이비 기자들의 민폐가 심각한 형편이었다. 조용수의 처형은 이런 상황에서 선택된 '스케이프 고오트'였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4일 만인 5월 19일 계엄사령부는 <민족일보>에 폐간을 통보함과 함께 조용수 사장을 비롯한 8명의 간부를 구속했다. 조총련계에서 1억 환의 불법자금을 들여와 신문사를 만들고 북한 괴뢰집단에 동조해왔다는 혐의였다.

조용수는 자유당 때 국회 부의장을 지낸 조경구의 조카이며, 대구 출신으로 대륜중학을 거쳐 연세대학 재학 중 6·25전쟁 와중에 중퇴하고 삼촌의 비서관으로 국회에서 근무했다. 51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에서 수학한 다음 재일거류민단 조직부 차장으로 활약, 조총련계와는 무관하고 오히려 재일교포 북송 때는 앞장서서 반대하기도 했다.

4월혁명을 맞아 귀국한 조용수는 사회대중당으로 경북 청송에서 7·29총선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서상일·윤길중·고정훈·김달호·이동화·송지영·이종률·안신규 등 혁신계 및 진보적 인사들과 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신문은 4대 사시를 내걸었다.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르키는 신문

민족일보는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민족일보는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민족일보는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

<민족일보>는 창간 때부터 시련이 따랐다. 진보적 논조 때문이었다. 장면 민주당 정부가 인쇄소 계약을 해지시켜 3일간 휴간한 뒤 3월 6일자로 속간할 수 있었다. 신문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하고, 민주당 정부의 2대 악법제정과 부정선거 원흉 등의 재판 지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신문은 61년 2월 8일 체결된 한미경제협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혁신계의 주장과 논리를 대변했으나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민족일보>의 독특한 편집과 진보적인 주장으로 창간 초기부터 국민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갓 창간한 신문이 동아·조선과 비슷한 수준의 5만부를 발행하고, 가판에서는 단연 1위를 달렸다. 군사정권의 사병이 된 검찰이 조용수 등을 구속하면서 밝힌 혐의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용수는 그가 일본에 있을 당시인 59년 8월 중순경, 대남 간첩인 이영근과 접선하여 소위 혁신세력의 규합 및 위장평화통일 주장의 지령을 받고 귀국한 후, 이(李)로부터 전후 1억 6백만 환의 공작금을 받아 윤길중·서상일·고정훈·최근우 등 혁신계 인물들과 활동하는 동시에, 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하여 북한 괴뢰의 주장과 동일한 언론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조용수 외의 피고 12명은 모두 <민족일보>의 사시결정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자이거나, 조와 이영근 간의 자료 수수를 담당한 자들이다.

검찰이 제기한 <민족일보>의 창간 자금은 조총련이 아니라 국내 혁신계 인사들로부터 지국설치 보증금 형식으로 모은 것이었다. 훗날 노태우 정부가 간첩이었다는 이영근에게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문화장을 줄 만큼, 이영근을 통한 조총련계의 불순자금 유입설은 날조된 기소장이었다.

8월 28일 열린 혁명재판 2심판부 김홍규 대령은 "민족일보가 평화통일, 남북협상 등 반국가단체 북한괴뢰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주장에 고무·동조했다"는 등의 혐의로 조용수·안신규·송지영에게 사형, 그외의 간부들에게는 무기 등 중형을 선고했다.

조용수는 장문의 상고이유서를 냈으나, 10월 31일 열린 상고심은 문석해·선우주·정기순·양회경·이존웅·계철순 재판관이 배석한 가운데 전우영 재판장은 상고를 기각, 사형을 확정했다. 변호인의 변론도 없이 진행된 재판이었다.

조용수는 61년 12월 21일 오후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32살의 짧은 나이에 이 땅에서 처음으로 진보 정론지를 발행하다가 창간한 지 100일도 못되어 쿠데타를 맞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한민국 언론사상 언론인이 재판에 의해 처형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조용수는 "민족을 위해 할 일을 못하고 가는 것이 억울하고, 신문을 만들기 위해 동지에게 꾼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겼다.

형이 집행되기 전 국제펜클럽과 국제신문인협회 등의 항의전문이 발표되고 일본에서는 구명운동이 제기되었으나 다수의 국내 언론이 침묵한 가운데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2월 20일 사형을 확인한 다음날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61년 1월 13일 국제저널리스트협회는 61년도 국제기자상을 추서했다.

민주화의 진척과 더불어 1998년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가 발족된데 이어 조용수 40주기를 맞아 2001년 학술대회가 열리고,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요청했다.

유족과 '위원회'는 2008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고, 2008년 1월 서울중앙지법은 무죄를 선언했다. 그리고 2011년 11월 대법원은 조용수 유족 등에 손해배상 확정 판결을 했다.

민족 언론인 조용수는 32살의 젊은 나이에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세력에 목숨을 빼앗긴 지 47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한없이 '지체된 정의'였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증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본인: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아들: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손자: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증손자: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고손자: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고고손자 : 서문한(徐文翰 현감)
                          • 고고고손자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고고고손자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고고고고손자: 서지원(徐智元 학자)
                              • 고고고고고손자: 서윤(徐尹 참봉(參奉))
                              • 고고고고고손자: 서괄(徐适 훈도(訓導))
                              • 고고고고고손자: 서세(徐洗찰방(察訪))
                              • 고고고고고손자: 서부(徐浮 목사(牧使))
                            • 고고고고손자: 서인원(徐仁元 목사)
                            • 고고고고손자: 서용원(徐勇元 생원)
                            • 고고고고손자: 서숙원(徐叔元 생원)
                          • 고고고손자 : 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
                        • 고고손자 : 서문간(徐文幹 현감)
                          • 고고고손자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
                        • 고고손자 :서문덕(徐文德 현감)
                      • 고손자 : 서습(徐漝 생원)
                      • 고손자 : 서환(徐渙 생원)
                • 아들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 아들 : 서원(徐遠 생원(生員)
                    • 증손자: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손자: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손자: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손자: 서거광 (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손자: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1]]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서용관 회장 서씨 시조 서신일 묘소 참배 [[2]] 달성서씨 서진 시조묘소 참배 [[3]] 대구서씨 서한 시조묘소 참배 [[4]] 연산서씨시조 서준영 시조묘소 참배 [[5]]

조선국권회복단

1915년 2월 28일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신상태, 남형우, 김재열, 홍주일, 박영모, 이영국, 김규, 정순영, 서병룡, 황병기 등 13인의 대구 청년들이 안일암에서 회동을 가졌다. 그들은 일제의 감시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시회(詩會)를 가장해 모였다.

당연히 시를 짓는 사람은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오랜 회의 끝에 부서별 책임자를 정했다.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과 박영모, 기밀부장 홍주일, 문서부장 이영국과 서병룡, 권유부장 김규, 유세부장 정순영, 결사부장 황병기가 선임되었다.

민족일보

4월혁명을 맞아 귀국한 조용수는 사회대중당으로 경북 청송에서 7·29총선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서상일·윤길중·고정훈·김달호·이동화·송지영·이종률·안신규 등 혁신계 및 진보적 인사들과 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신문은 4대 사시를 내걸었다.

대구 3·8만세운동

3·8만세 운동은 '박상진·윤상태·서상일 등이 중심이 돼 독립운동을 펼쳤다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는 독립운동가 이응창 선생과 서상일 선생이 설립한 70년 전통의 사학으로, ‘진실’이라는 교훈 아래 바른 마음 참된 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달서지역 명문 여자학교다.

조양회관

조양회관은 1992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서상일 선생의 주도로 세워진 교육회관으로, 대구 민중계몽운동 진원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현재는 대구 지역 광복회 사무실이 들어서 있으며, 항일독립운동 전시실이 조성돼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