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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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당(民衆黨)

1965년에 창당되었던 정당.연원 및 변천1963년 단일야당의 형성에 실패한 이래로 야권은 계속 통합노력을 기울인 끝에 1965년 5월 3일 민정·민주 양당이 통합선언대회에서 이 당의 창당을 선언하고, 같은 해 6월 14일 함당 전당대회를 통해 창당하였다.

이 당은 중앙당부에 당의 최고의결기관인 전당대의원대회·중앙위원회·중앙상무위원회·최고위원회·지도위원회·당무회의 등의 기구를 두고, 각 지구당부에도 일부위원회와 부서를 두었다. 전통보수정당의 통합체였던만큼 그 정강도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대의정치·경제정책 및 국제관계유지와 국토통일을 기약하는 것이었다.야당통합으로 발족된 ‘민중당’은 제3공화국에서 야당제도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지만, 지도위원의 선출을 둘러싸고 민정당계의 윤보선(尹潽善)계와 민주당계의 박순천(朴順天)계 간의 갈등을 드러냈다. 그리고 양파간의 갈등은 민중당이 존속하는 동안 계속 노출되어, 결국은 분당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은 한일협정의 비준과 국군의 베트남파병동의안 처리에서 비롯되었다.즉, 1965년 7월 14일 임시국회에서 부의장 장경순(張坰淳)이 정부제안의 한일협정비준동의안과 베트남파병동의안을 전격적으로 발의시키고, 민중당이 비준동의안의 발의를 막지 못한 것을 문제삼아 윤보선계를 중심으로 한 당내 일부세력은 당해체결의서 서명 및 탈당계를 받기 시작하였다.반면에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을 중심으로 한 당주류계는 윤보선계의 이와 같은 행동을 이적행위로 단정하고 해당분자들에 대한 징계조처를 취할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당공식기구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윤보선계는 서명범위를 확대하여나가 당해체론과 탈당론 등으로, 강경·온건 양파가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윤보선은 탈당계를 제출함으로써 의원자격을 자동으로 상실하였다.이 탈당계 제출로, 한일협정비준저지방안에 대한 강경노선 지지자들은 원외투쟁을 전개할 태세였고, 온건노선 지지자들은 국회투쟁을 통하여 정부 및 여당과 싸우는 것이 국회의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한일협정비준예비심사를 맡은 여야 합동의 한일협정특별위원회는 8월 11일 정부가 제출한 한일협정비준안을 공화당의 강행에 의하여 원안대로 통과시켰다.민중당은 긴급의원총회를 열고 의원직을 총사퇴하기로 의결, 사퇴서를 일괄하여 의장 이효상(李孝祥)에게 제출하였으나, 국회는 9월 13일 본회의에서 민중당 소속 53명의 의원직 사퇴서를 일괄 반려하였다.이에 대하여 당내 주류 온건파는 원칙적 복귀의 전제 아래 복귀시기를 관망하자는 방침인 데 반하여, 당내 강경파와 원외측은 이 방침에 크게 반발, 양파의 다툼은 ‘선언 없는 분당’의 상태로 굳어져갔다.주류온건파는 자파만으로라도 당기구의 정상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방침을 정하여 사실상의 분당상태로 들어가고, 여기서 강경파는 온건파에 대한 와해공작을 펴는 한편, 탈당의원인 서민호(徐珉濠)·정일형(鄭一亨) 등이 주동이 되어 구 자유당계 일부와 민주구락부·한일회담반대투쟁위원회·학계·종교계·언론계 등 인사 및 예비역장성들과 신당 창당을 위한 접촉을 벌여 윤보선을 당수로 한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하게 되었다.신한당의 이탈 뒤 온건파만으로 구성된 민중당은 1966년 7월 8일 성명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재야세력을 흡수하는 한편, 같은 해 7월 19일 전당대회에서는 기구개편과 당헌의 개정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민중당에서 신한당이 분리되어 각각 독자적인 정당활동이 전개되었으나 제6대 대통령선거는 다시 야당통합의 계기가 되었다.즉, 민중당의 대통령후보 유진오(兪鎭午)와 신한당의 대통령후보 윤보선은 정권교체를 위한 야당후보단일화의 필요성에서 양당간의 관계개선을 도모하여 통합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7년 1월 22일 유진오와 윤보선의 회담에서 조속한 합당을 결정, 2월 7일 양당의 통합 및 신당창당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민중당은 신민당(新民黨)으로 새로운 발족을 보게 되었다.의의와 평가민중당은 근대적 정당이라기보다는 의회진출을 목표로 하는 명망가 정당이었고, 또한 파벌을 중심으로 하여 이합집산을 계속한 정파의 연합체에 가까웠다. 이와 같은 점에서 공화당 정권의 견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채, 단명으로 소멸됨으로써 당의 제도화를 이루지도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