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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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국(濊國)

예인에 관한 기록은 중국인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 위서 동의전과 고려인 김부식과 승려 일연이 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① “(부여에서는) 그 도장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편)

② “남해 차차웅 16년(서기 19년) 봄 2월,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濊王印)을 주워서 바쳤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③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인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穢王印)을 발견해 바쳤다.” (삼국유사 마한 편)

중국과 한국의 옛 문인이 각기 다른 시공간에 쓴 사서에서 예왕인(濊王印)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우린 삼국지 위서 동의전 부여 편의 ‘예왕지인’에 대한 언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연 부여가 예국의 일원이었던 것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북명(北溟)과 명주(溟州)는 지금의 강릉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국은 만주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지역인 것일까. 삼국지 위서 동의전 부여 편에서 아래 기사를 더 찾을 수 있다.

“나라(부여)에 옛 성이 있어 예성(濊城)이라 한다. 원래는 예맥(濊貊)의 땅이라, 부여가 그 안에서 왕 노릇을 하면서 스스로 망인(亡人)이라 하니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부여가 예의 땅을 빼앗아 형성한 나라임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예의 땅을 부여가 차지했기 때문에 옛 성을 아직도 ‘예성’이라고 부르며, 중국으로부터 예왕의 관인(濊王印)을 받았다. 부여는 예의 땅에서 왕국을 건설했지만, 토착민인 예족을 무마하기 위해 스스로 망인이라고 했던 것이다. 부여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동으로는 읍루, 서쪽에는 선비와 국경을 접해 있는 나라였다. 위치상으로는 만주에서도 북쪽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만주 지역의 예족부여에 의해 흡수되고, 잔여 세력이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안 일대에 옮겨와 만든 나라가 한반도의 예다. 즉 동예였던 것이다.

삼국지가 편찬된 3세기 말에는 만주의 예가 부여 또는 고구려에 흡수 및 합병되고, 한반도의 동예가 예의 명맥을 있고 있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예도 동예를 의미한다. 반도 예, 즉 동예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국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거의 비슷하게 나온다.

① 예(濊)는 남쪽으로 진한,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와 접해 있고 동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 있으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에 속한다. 호수는 2만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② 명주(溟州)는 원래 고구려의 하서량(河西良, 하슬라)으로서 뒷날 신라에 속했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지금 신라의 북부 경계에 있는 명주는 대부분이 예(濊)의 옛 나라이다”라고 써 있다. 이전의 역사서에는 부여(扶餘)를 예의 땅이라고 하였는데 잘못인 듯하다. (삼국사기 잡지)

③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이다. (삼국유사 마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