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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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서원(龜溪書院)

구계서원(龜溪書院)은 남차1리에 세웠던 서원으로, 광해군 5년(1613)에 현감 조인행(趙仁行)과 신경행(辛景行) 등이 인근의 사람들에게 통문을 보내, 청안현감과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낸 서사원(徐思遠), 보령현감을 역임한 이득윤의 스승 박지화(朴枝華), 괴산현감을 지낸 이득윤(李得胤)을 배향하였다. 그 후 현종 7년(1666)에는 송시열의 문인 황처검(黃處儉) 등이 사림들에게 통문을 보내, 다시 이준경(李浚慶)과 헌릉참봉을 지낸 이당(李塘)을 추가로 배향했다. 이때 송시열에게 문의해 위치를 정하였는데, 이준경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서사원ㆍ박지화ㆍ이득윤ㆍ이당을 차례로 배향했다. 숙종 5년(1679)에는 현감 남한명(南漢明)이 상량문과 서원기 및 고적 사실을 써서 걸었으나,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없어지고 말았다. 이인좌의 난은 당시 소론(小論)과 남인(南人)이 중심이 되어 영조(英祖)와 노론(老論)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모반사건이다. 이인좌는 경기도와 경상도 등 여러 지역의 선비들과 난을 모의했으며, 이들은 상여를 가장해 그 안에 무기를 숨기고 ‘수름재’를 거쳐 청주로 들어가 청주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주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군과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도안을 비롯한 청안 일대가 이들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때 곡산연씨 가문의 연세홍(延世鴻)ㆍ연수창(延壽昌)은 의병을 모아 이인좌의 무리들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연수창은 상당산성의 적을 물리쳐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사족(士族)들은 소론계도 있었지만, 노론계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계서원’은 고종 6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어 지금은 초석만 남아있다. 구계서원 터는 증평군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달성이다. 자는 행보(行甫)이고, 호는 악재(樂齋)이다. 전교 서흡(徐洽)의 아들이며, 큰아버지인 서형(徐泂)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이황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였고, 선조 때 학행으로 감역과 찰방을 지냈다. 선조 28년(1594년)에 청안현감으로 부임하여 연충수 등과 함께 향교를 정비하고 학사(學舍)에서 사림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그 후 1597년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듬해 사임하였으며, 1602년에도 연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형조ㆍ호조정랑, 역학교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과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악재집(樂齋集)』이 있다.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는 원길(原吉)이고, 호는 동고(東皐)이다. 홍문관수찬 이수정(李守貞)의 아들이며, 한성부 동부 연화방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는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죽음을 당했다. 이때 연좌되어 아버지, 형 이윤경과 함께 6살의 나이로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 그 후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그는 외할아버지 신승연과 황효헌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연경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중종 26년(1531)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1533년에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 해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서 기묘사화 때 죄를 받은 사류들의 무죄함을 역설하다가,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에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장령ㆍ홍문관직제학ㆍ부제학으로 승진하였고, 그 후 성균관대사성ㆍ형조참판ㆍ병조판서ㆍ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550년 정적이었던 영의정 이기(李?)의 모함을 받아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는 1555년에 을묘왜란을 물리쳐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하였으며 1558년에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1567년 하성군 균(鈞)을 선조로 즉위시키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는데, 이때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趙光祖) 등과 을사사화로 처벌을 받은 모든 사림들을 신원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ㆍ이이(李珥) 등 신진사림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동고유고(東?遺稿)』와 『조선풍속(朝鮮風俗)』등이 있다.  

박지화(朴枝華, 1513∼1592)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수암(守庵)이다. 서경덕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여 유ㆍ불ㆍ선 등에 통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죽었다. 그의 가문은 고조 때 청주로 이주하였고, 그는 이득윤에게 역학 등을 가르치는 등 후진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후에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저서로는『수암유고(守庵遺稿)』ㆍ『사례집설(四禮集說)』등이 있다.   이득윤(李得胤, 1553∼1603)은 조선 중기의 역학자이자 악인(樂人)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자는 극흠(克欽)이고, 호는 서계(西溪)이다. 고려 말의 문신 이제현의 후손으로, 청원군 옥화동(玉華洞)에 거주하였다. 그는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근처에 살던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을 배웠고, 선조 21년(1588)에 진사가 되었다. 1597년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희릉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념하다가 왕자사부가와 형조좌랑ㆍ의성현령을 지냈다. 그는 광해군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해 고향에 머무르면서 선영 옆에 정사(精舍)를 짓고 완역재(玩易齋)라고 하였다. 김장생(金長生)ㆍ정두원(鄭斗源) 등과 서한을 교환하며 역학과 음악을 토론하였다.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두어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 거문고에 관련된 것을 집대성하여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라는 거문고악보를 남겼다. 그는 인조반정 후 선공감정(繕工監正)이 되었고, 이듬해 괴산군수가 되어 이괄(李适)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서계집』 등이 있으며, 특히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는 『안상금보(安常琴譜)』ㆍ『조성금보(趙晟琴譜)』와 더불어 임진왜란 이전의 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당(李塘, 1567∼1644)은 본관이 고성이고, 자는 진언(縝彦)이다. 청안현 남쪽 군방촌(群芳村)에 거주하였다. 선조 39년(1606)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광해조에 국가기강이 문란해지자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인조반정 후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더욱 힘써 인근사림들이 모여들어 경내의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났다. 이득윤ㆍ황후천(黃朽淺) 등 여러 선비들과 친하게 사귀었고, 주역과 춘추를 강학하였다. 만년에 스스로 방촌거사(芳村居士)라고 불렀고, 현종 7년(1666)에 구계서원에 추가로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