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련(徐憐) 판관 사적비(事跡碑)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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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판관(濟州牧判官) 서련(徐憐)은 중종 8년(1513) 약관(弱冠)의 나이로 제주판관(濟州判官)에 부임한 후 김녕사굴(金寧蛇窟)의 뱀에게 해마다 어린 처녀를 제물로 바쳐 오던 미신과 폐습을 퇴치한 선정관(善政官)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서(徐)판관의 행적은 서씨의 자랑일 뿐아니라 제주의 역사적 문헌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김녕사굴에 얽힌 이야기를 남겨 놓은지 460년이 흐른 후 김녕사굴 앞에는 50여년 전 세워진 비(碑)가 초라하게 그 유래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 비석은 1942년 구좌면 하도리(下道里) 출신의 유지(有志) 강공칠(康公七)이 서련 판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였다. 그러나 비문(碑文)은 오랜 세월동안 풍수에 씻겨 읽기조차 어렵게 되었으며 외관 또한 초라하게 변해 버렸다. 때문에 이곳을 찾는 뜻 있는 인사나 관광객까지도 새로운 사적비(事跡碑) 건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1971년 연산인(連山人)이며 제헌국회의원이었던 서용길(徐容吉)이 사적비 건립을 발의하고 제주문중에 협조를 구해 왔다. 재경 연산서씨종친회(在京連山徐氏宗親會)에서 본 사업을 추진하려는데 제주라는 지역적 문제로 당국의 지원을 받고 절충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제주파연친문중회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에 제주연친회는 이 사업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제주도 관계당국에 사적비건립사업 지원비 요청을 하는 등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에서는 서(徐)판관이 이천서씨의 후손으로만 알고 있었고, 연산인(連山人)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더구나 한때는 서련 판관을 입도조의 부친인 서홍철(徐弘喆) 판관과 동일 인물로 인식하였던 때마져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김녕사굴의 일화(逸話)에 등장하는 서련 판관이 연산徐氏임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서련은 연산(連山)을 관(貫)으로 한 연성군(連城君) 서준영(徐俊英)의 5세 손이다. 그러나 연산인도 비조(鼻祖)는 역시 이천서씨의 시조인 아간공(阿干公) 서신일으로 19세가 된다. 오늘날 연산 서씨로 분파(分派)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연성군(連城君)에 봉(封)해진 가문을 빛내기 위한 것으로 서련이 제주에 부임할 당시에는 이천(利川)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보아진다. 제주문중에서는 본관을 초월하여 서련과 같은 선정관(善政官)의 사적비 건립은 제주에 있는 서씨문중이 주관하여 추진함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었다.

또한 서울에서 제작하여 내려보낸 사적비는 크기가 너무 작아, 관광지에 새로이 세우는 사적비로서는 적당치 않다는 것이 관계기관과 현지 주민의 여론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10월 16일에 열린 문중회에서는 본 사업을 제주연친회에서 주관하여 추진키로 결의하여 활발하게 사업추진이 진행되었다. 제주문중에서 사업을 주관하되, 본 사업을 도민적 행사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건립추진위원회의 구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추진위원장에 초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박경훈(朴景勳)을 추대하고 제주도내 주요 기관장과 유지, 북제주군 지방문화재위원, 도내 서씨 문중인사 등 30여명으로 구성된 「서련판관 사적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여기에 제주도의 문화재관리위원회에서도 사적비 건립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제주도에서 문화재 보수비로 30만원, 북제주군에서 10만원을 보조해 주었다.

서울에서 보내온 비석과는 별도로 새롭게 비문을 제작한 제주문중에서는 1972년 1월 10일에 착공하여 2월 28일 사적비는 건립을 완료하였다. 4개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전면에는 「제주판관서련공덕비(濟州判官徐憐功德碑)」라고 새겨 있고, 후면에는 1백 단어에 이르는 서판관의 약력과 행적이 적혀있다. 총 공사비는 83만5천원이 소요되었는데, 제주문중에서 부담한 것은 43만5천원이었다.

1972년 4월 10일에는 서(徐)판관의 살신구민(殺身求民)의 덕(德)을 기리기 위한 사적비 제막식이 김녕사굴 앞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이승택(李昇澤) 제주도지사 등 도내 각급 기관장과 서씨 문중인, 주민 등 3백여명이 참석하였다. 제막식 행사는 개식사 · 제막 · 행제(行祭) · 분향 · 서련판관 약력보고 · 경과보고 · 비문낭독 · 치사 · 송덕사 · 감사패 증정 · 기념식수 · 제막기념 무용공연 순으로 거행되었다. 감사패는 김녕사굴 관리인으로서 유적지 관리와 본 사업을 추진하는데 적극 협조해 준 김군천(金君天)에게 증정되었다.

이 사업이 종료된 후 재경연산서씨종친회에서는 서판관의 본관이 연산(連山)임을 들어 건립비용의 내용에 이천서씨의 후손인 양 기재됐음에 유감의 뜻을 서신으로 보내왔다. 이에 제주문중회에서는 서씨의 뿌리는 이천이므로 분파적(分派的)이고 협의적(狹義的)으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나, 넓은 의미로 보면 이천(利川)의 후손임이 분명하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처음부터 편협한 생각으로 이 사업에 임했다면 다른 본관(本貫)을 가진 종친회에서 발의한 사업을 제주문중에서 시종일관 성의를 기울이지는 않았을 것이며, 비문에는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비를 세운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지, 이천서씨 문중에서 세운다고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오로지 서(徐)판관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제주문중회에서 정성을 바친 사업을 협의(狹義)로 평가함은 오히려 유감임을 회신하였다.

어떤 일이든 마치고 보면 다소의 부작용이든 아쉬움이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시 서련판관 사적비 건립사업은 그 발의가 연산 서씨종친회(連山徐氏宗親會)에서 되었으나, 제주의 이천서씨문중회에서 주관하여 사업을 추진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본관(本貫)을 초월하여 자랑스런 선현(先賢)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문화재적인 가치를 높이고자 하여 스스로 짊어진 사업이었다. 이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당시 회장이었던 서상진(徐相眞) · 부회장 서상경(徐相京) · 총무 서용주(徐鎔洲) · 재무 서상흠(徐相欽) 등 임원들이 1년에 걸쳐 애쓴 노력의 공로는 이러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