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후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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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9년(선조32)~1659년(효종10)

자 중선(仲先). 시시당(是是堂) 서량(徐亮)의 아들. 선교랑(宣敎郞).

공은 효성과 우애를 갖추었고, 도량이 넓어서 아주 어린 나이에도 큰 뜻을 품었다고 함. 조금 성장하여 배움에 힘을 쏟아, 서사(書史)에 박통하였는데,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끝내 불리(不利)하였음.

큰 형님과 함께 서울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권문(權門)에 빌붙은 한 종인(宗人)이 공의 형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공의 형제는 이를 준엄하게 배척하고, 작별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돌아옴. 그러자 그 종친이 고을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사천(沙川)의 조카들이 나를 원수처럼 미워하니, 정말로 모기가 철우(鐵牛)에게 달려들고 비가 연잎을 치는 격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하였으나, 끝내 무사하였음.

공은 평생 검약함을 지키고, 또한 마땅한지를 미리 따져서 남이 주는 물품을 받았으므로 구차하지 않았음. 창락찰방(昌樂察訪) 이유원(李惟源)은 평소 공과 잘 지내온 사람이었는데,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갈 때에 공에게 관용(官用) 물품과 지속(紙束)을 보내주니, 공은 다만 지속(紙束)을 받고 나머지 관용 물품은 모조리 돌려보냈다고 함. 공은 사람들을 성심껏 대하고,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잘 구호하여 주었음.

손자 서성구(徐聖耈)가 「王考宣敎郞府君遺狀」을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