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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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35(헌종 1)∼1908(순종 1). 조선 말기의 문신.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원중(元仲). 서긍보(徐兢輔)의 아들이다.


가족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경주(徐景霌 달성위 선조부마)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정리(徐貞履 부사)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상(徐文尙) 병조 참의)
        • 고고조할아버지:서종태 (徐宗泰 영의정 정1품)
          • 고조할아버지:서명균 (徐命均 좌의정 정1품)
            • 큰증조할아버지:서지수 (徐志修 영의정 정1품)
              • 큰할아버지: 서유로(徐有老 진사)
              • 큰할아버지:서유신(徐有臣 대제학 정2품)
                • 큰아버지:서영보(徐榮輔 대제학 정2품)
                  • 사촌: 서기순(徐箕淳 대제학 정2품)
              • 할아버지: 서유후(徐有後 참봉 통훈대부)
            • 증조할아버지:서무수(徐懋修 학자)
              • 할아버지:서유돈(徐有敦 현감)
                • 아버지: 서긍보(徐兢輔 현감)
                  • 본인: 서정순(徐正淳 예조판서 정2품)
                • 작은아버지:서당보(徐堂輔 영의정 정1품)
                • 작은아버지: 서현보(徐玄輔 생원)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명순(徐命純 진사)
            • 작은증조할아버지: 서회수(徐晦修 공조판서 정2품)
          • 작은고조할아버지:서명빈(徐命彬 이조판서 정2품)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2]]

생애 및 활동사항

1871년(고종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檢閱)이 되었다. 공조참의·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1875년 대사간이 되었고 다음 해에 순천부사로 외직에 나갔다.

그 뒤 형조참판·이조참판·경주부윤·여주목사·이천부사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89년 도승지가 되어 함경도 방곡령(防穀令) 사건, 한성개잔(漢城開棧) 문제 등 일본 및 청나라와의 복잡한 외교문제를 처리하였다. 1890년 대사성(大司成)·형조판서, 1891년 예조판서가 되었고, 진하 겸 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92년 함경감사가 되었다가, 1894년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의 공무아문대신으로 활약하였다. 1895년 중추원의관·빈전제조(殯殿提調)·시종원경(侍從院卿)을 거쳐 다음 해에 강원도관찰사·함경남도관찰사가 되었다.

1898년 중추원의관·의정부찬정·임시서리의정을 지내고 독립협회의 요구에 따른 개각 때 박정양내각(朴定陽內閣)의 법무대신 겸 고등재판소재판장이 되었다. 이때 시임대신(時任大臣)으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출석, 이 회에서 채택한 의안 11조에 찬성하고 왕에게 올리는 헌의6조(獻議六條)에 서명하는 등 적극 참여하다가 면관되었다.

1899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법규교정소의정관(法規校正所議定官)이 되어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제정에 노력하였고 태의원경(太醫院卿) 궁내부 특진관을 지냈다. 1900년에는 홍문관학사·장례원경(掌禮院卿)·표훈원의정관(表勳院議定官)을 역임하였다. 190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표훈원의정관·중추원찬의·표훈원내관 등을 거쳐 1906년 중추원의장이 되었다. 1908년 규장각제학을 지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