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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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친척돈목(親族敦睦), 형제담락(兄弟湛樂)” 등의 말을 써서 벽 위에 걸어놓고 늘 보면서 행실을 닦는 준칙으로 삼았다고 함.

후진들을 가르치는 데에도 힘을 써서 공의 문하에서 재주에 따라 성취한 자들이 많았는데, 공은 삭망(朔望)에는 반드시 설강(設講)하곤 하였음. 공은 위의(威儀)가 특출하였기 때문에, 수령인 신필하(申弼夏)가 그러한 공을 보고 향약(鄕約)을 시행할 때에 공을 도약정(都約正)으로 삼기도 하였음. 이때 그 자리에 있던 서울 사람이 공의 행동거지와 논의를 보고 “내가 서울의 위인(偉人)들이 많음을 보았지만, 일찍이 이러한 인물은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고 함.

무신란(戊申亂)에 대항하기 위해 순흥에 의병진이 결성됨에, 공은 황수익(黃壽益) 등과 더불어 사병도총(司兵都摠)으로 임명되었음.

공이 돌아간 후 북벽(北壁) 김홍제(金弘濟)는 “몸을 다스림이 청렴(淸廉)하고, 행실이 구차스럽지 아니하며, 조심하고 삼갔고, 지론(持論)이 평정(平正)하며, 평생토록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나 또한 세속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다는 평은, 나의 말이 아니라 곧 일세(一世)의 공변된 말이다.”라고 하였음.

문집이 간행됨. 족손(族孫) 창재(昌載)가 「進士訥軒徐公行狀」을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