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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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서광조(徐光朝)[1897~1972]는 1897년 2월 29일[음력]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서광조는 1917년 3월 23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장일환(張日煥)·강석봉(姜錫奉) 등과 함께 비밀 결사인 조선 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하고 전라도 지역 책임자로 선임되어 항일 활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조선 국민회는 평양 출신의 장일환이 1914년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朴容萬)의 지도를 받고 이듬해 귀국하여 조직한 모임이며, 평양 신학교와 평양 숭실 학교 졸업생들을 가입시켜 그 세를 확대해 나갔다. 이들은 국내의 청년들을 집결시키고 미국 하와이에 있는 국민회의 박용만과도 연락하며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선 국민회 회원 배민수·노덕순(盧德淳) 등이 검지를 잘라 "대한 독립"이라는 혈서를 쓰는 등 결연한 각오로 활동을 벌였고, 기관지 『국민보(國民報)』를 간행·배포하였다. 중국 안동현에 연락부를 설치하고 해외 각지와도 연락을 하였는데, 1917년 7월 회원들 간의 연락에 차질이 발생하면서 사실이 누설되고 대부분이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서광조는 1918년 3월 16일 평양 지방 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19년에서 1922년까지 제주도로 거주가 제한되었다. 1919년 제주도에서는 청년들을 모아 금주회(禁酒會)를 조직하고 돈을 모아 여자 야학을 신설하여 교육하였다. 1920년 9월 목포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도덕」이란 주제로 강연하던 중 일본 경찰의 제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1922년부터 전라남도 지방을 중심으로 반도 고학생 친목회 순회 강연을 개최하였다. 해방 후 1950년 전남 보도 협회(全南報道協會)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63년 전라도 광주에서 있었던 군정 연장 반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해 민정당 전라남도 도당 준비 위원과 중앙 위원 등을 지냈다.


서광조의 묘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리 공원묘지에 있다. 묘역의 연보비에는 “우리 한국은 한국인으로서 중국은 중국인으로서 자치의 자유를 향유할 희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장래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금일에 동지의 결속을 도모하여 그 준비를 해야 한다. 「조선 국민회 결성 취지」중에서"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