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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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년(광해군 9)∼1678년(숙종 4). 조선 중기 음관‧관료. 자는 여수(汝守)이다. 본관은 대구(大丘)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부는 증영의정(贈領議政) 서해(徐嶰)이고, 조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충숙공(忠肅公) 서성(徐渻)이다. 부친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와 모친 선조(宣祖)의 장녀 정신옹주(貞愼翁主)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이순남(李順男)에게 배웠다.

문장이 뛰어나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부친은 종친‧의빈들과 함께 먼저 강화도로 피난을 갔고, 백부는 임금이 탄 어가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혼자 조부모를 모시고 강화도로 가려 하였으나 이미 강화도가 함락된 후라 들어갈 길이 막혀버리자, 배를 샀다. 여러 섬으로 피난을 다니면서도 조부모를 비롯하여 식구들 중에 단 한 명도 해를 입은 사람이 없을 만큼 성실하게 돌보았다.

피난 다닐 때, 통영우후 황익(黃瀷)이 어선을 왜구로 착각하여 공격하자 어민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배가 전복되어 위기에 처하였다. 이때 앞장서서 황익을 설득하여 백성들을 다른 섬으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1643년(인조 21) 부친상을 당하였다. 1648년(인조 26) 식년시 생원 3등 54위로 합격한 후, 바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전시직부수(轉侍直副率)‧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위수(衛率)‧형조좌랑(刑曹佐郞)‧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 등에 제수되었다.

1653년(효종 4) 모친상을 당하고, 모친의 3년상이 지난 1655년(효종 6)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공조좌랑(工曹佐郞)‧형조정랑(刑曹正郞)‧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한산군수(韓山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한산군수 시절에 어사가 조정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식구를 데리고 부임하였다는 계문을 올려 파직당하였다.

1661년(현종 2) 다시 복직되어 호조정랑(戶曹正郞)‧평시서령(平市署令)‧순안현령(順安縣令)을 지내고, 4번에 걸쳐 청나라 사신을 다녀왔다. 그 후 금구현령(金溝縣令)‧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삼척부사(三陟府使) 등을 지냈다.

묘는 경기도 양주(楊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