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주
정의
조선시대 통헌대부, 봉헌대부, 숭덕대부 등을 역임한 문신.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개설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자순(子順), 호는 송강(松岡).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서성(徐渻)이며, 어머니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송영(宋寧)의 딸이다. 부인이 선조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2년 정신옹주(貞愼翁主)와 혼약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환도한 뒤 혼례를 올려 달성위(達城尉)에 봉해졌다. 정유재란 때는 선조의 총애를 받아 총관 겸 상방제조(摠管兼尙方提調)로서 항상 측근에서 시종하였다. 이때 『선원록(璿源錄)』을 감수한 공로로 통헌대부·봉헌대부로 계속 품계가 올랐다. 광해군 때,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나자, 아버지 서성과 함께 반대하다가 아버지는 영해(寧海)로 유배되었고 그 역시 크게 서용되지 못하였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아버지가 복직되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조를 호종한 공이 인정되어 숭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상례를 끝마치고 금화내자제조(禁火內資提調)를 겸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서 온 가족이 강화도로 피난을 갔지만 정신옹주가 피난생활을 힘들어한다는 이유로 서울로 돌아왔다. 사헌부에서 국가와 존망을 함께해야할 근신(近臣)과 거실(巨室)의 행위가 아니라며 삭탈관직을 청하자 인조가 그를 파직시켰다. 1631년(인조 9) 아버지가 죽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만년에 다시 상방원(尙方院) 및 관상감(觀象監) 제조와 총관(摠管)을 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