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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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의(金富儀)
대표명칭 김부의
한자표기 金富儀
생몰년 1079년-1136년
본관 경주(慶州)
이칭 김부철(金富轍)
시호 문의(文懿)
자유(子由)
시대 고려
김근(金覲)



정의

고려 중기의 문신.

내용

초명은 김부철(金富轍). 김부의(金富儀)는 김근(金覲)의 넷째 아들로, 김부필(金富弼), 김부일(金富佾), 김부식(金富軾)은 그의 형들이다.

김부의는 1097년 19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111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추밀원부사 김연(金緣)을 따라 송나라에 가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돌아와 감찰어사가 되었다. 1117년 금나라 사신이 와서 형제국(兄弟國)이 되기를 청하자, 금나라를 회유하기 위해 화의하자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재상의 저지로 왕에게 전달되지는 못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첨사부사직(詹事府司直)이 되어 문학으로 우대를 받았고, 1123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특진했다. 1124년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성과 이부·호부·예부의 상서(尙書)를 거쳐 한림학사승지 등을 역임했다.[1] 1134년 묘청(妙淸)이 서경천도와 신궁건립을 주장하자 형 김부식과 함께 극력 반대하였고, 이듬해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기전략책인 평서십책(平西十策)을 올리고, 좌군수(左軍帥)에 이어 지추밀원사가 되어 출정하였다. 그 전략으로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 인종에게 금대(金帶)를 받았다.[2]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따르면, 그는 성품이 청렴하고 근신하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관각에도 여러 차례 복무하여 형 김부식과 함께 문명을 떨쳤다고 한다. 조정에서 필요로 한 외교와 공식 문서 작성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송 황제의 칭찬을 받은 일도 있었으며 시에도 능숙하여 금나라 사신 한방(韓昉)으로부터 탄상을 받았다. 또한 『고려사』에서는 "시문이 호탕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평한다. 그러나 현재 문집은 전하지 않으며, 다만 『동문선(東文選)』에 칠언절구 5수와 표전(表箋) 11수, 그리고 치어(致語) 1수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3]

비문의 찬자

김부의(金富儀)가 지은 비문으로는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가 있다.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 김부의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김부의 김부필 A는 형제 B가 있다 A ekc:hasBrother B
김부의 김부일 A는 형제 B가 있다 A ekc:hasBrother B
김부의 김부식 A는 형제 B가 있다 A ekc:hasBrother B

주석

  1. "김부의",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박성봉, "김부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권영민, 『네이버고전문학사전』, 2004. 온라인 참조: "김부의", 고전문학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 "김부의",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박성봉, "김부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권영민, 『네이버고전문학사전』, 2004. 온라인 참조: "김부의", 고전문학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