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청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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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2일 (월) 17:46 판 (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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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금복
(靑衿服)
유생복.jpg
대표명칭 청금복
한자표기 靑衿服
이칭별칭 청금(靑衿), 청금단령(靑衿團領), 청금원령(靑衿圓領), 청단령(靑團領), 청삼(靑衫)
구분 의복
착용신분 유생
착용성별 남성



정의

조선시대 유생이나 성균관 학생의 옷이다.[1]

내용

시경』의 "청청자금(靑靑子衿), 푸른 옷깃의 그대여"라는 시구[2]의 첫 문장에서 유래되었다. 각주에 '금(衿)'은 '영(領)'으로 '옷깃'이다. 성균관의 학생복인 '청금(靑衿)'이라는 명칭은 당(唐)에서 전래된 것으로 국학(國學)의 학생복인 청금복(靑衿服)에서 유래되었으며, 복식 형태는 명(明) 국자감의 청원령(靑圓領)[3]에서 기인 하였다.[4]

왕세자, 왕세손입학례 과정 중에 성균관 대성전(成均館 大成殿)에서 작헌의(爵獻儀)를 행할 때 왕세자의 상복곤룡포를 벗고 학생복으로 갈아입었다.[5] 1485년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어 있는 성균관 제학생도 학생복의 기본 구성은 복건 형태의 '연건후수(軟巾後垂)'에 청금단령(靑衿團領)이었다.[6]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의 복장과 유사하여 청금복 착용을 기피하게 되어 사복(私服)인 직령(直領)을 착용하였다. 18세기 후반 직령과 도포(道袍)의 착용이 혼재하다가 이후 도포로 정해지는데, 18세기 풍속화와 왕세자입학도 등에 유생의 복식이 직령도포로 그려져 있다.[7]

1746년(영조 22) 난삼(襴衫)을 여러 학생들의 방방의에서 착용하는 복식으로 개정하여 청금복난삼으로 이분화가 이루어졌다. 1884년 고종갑신의제개혁의 후속 조치인 사복변제절목(私服變制節目)에서 유생의 재복(齋服)은 구제(舊制)를 유지하되 사복(私服)은 착수의(窄袖衣)로 규정하였다.[8]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왕세자 청금복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학생 청금복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유생 청금복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청금복 연건후수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한국복식사전:청금복
  2. 전관수, 『한시어사전』, 국학자료원, 2007. 온라인 참조: "청금", 한시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太宗實錄』 11년(1411년) 6월 12일: 「成均館及五部儒生, 始着靑衿. 依朝廷之制也.」
  4. 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80쪽.
  5. 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90~91쪽.
  6. 『經國大典』 ,「禮典」, '儀章條', "諸學生徒 緇布巾(在學) 團領(儒學用 靑衿) 條兒."
  7. 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242쪽.
  8. 정희정,「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242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강효진, 「조선왕실의 왕세자 교육과 그 특징」, 건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 손윤혜, 「조선후기 왕세자 입학례 복식 고증」,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 손윤혜ㆍ이은주, 「1817년 효명세자 입학례의 왕세자 복식 고증」, 『문화재』 46권 1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 장재천, 「조선시대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례」, 『韓國思想과 文化』 55권, 한국사상문화학회, 2010.
  • 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 홍나영, 「조선시대 儒生服飾의 변천에 관한 연구 –성균관 학생복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1권 3호, 한국의류학회, 1997.

더 읽을거리

유용한 정보

유교넷 유교용어사전:청금복(靑衿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