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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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장동룡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12일 (화) 13:55 판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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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鳴梁大捷)
대표명칭 명량대첩
한자표기 鳴梁大捷
이칭 명량
유형 전투
시대 조선
날짜 1597년(선조 30) 9월 16일
관련인물 이순신,안위,김응함
관련장소 명량(울돌목: 전라남도 진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


정의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이순신이 명량(울돌목: 전라남도 진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내용

조선수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조선 수군은 다대포(多大浦)·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고 원균이억기 등의 장수는 전사하였다.
이에 7월 22일 류성룡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 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칠천해전에서 배설이 탈출시킨 전선 12척과 일반 백성들이 나중에 가져온 한 척을 더해 13척의 전선으로 수군을 정비하여 닥쳐올 전투에 대비하였다. 왜군에게 대패하여 얼마남지 않은 조선수군의 전력을 우려하자 당시 이순신은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비장한 각오의 장계를 올렸다.

해전의 전개

8월 왜선 8척이 해남의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순신은 이를 격퇴하고, 진(陣)을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9월 7일에는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어란포에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다시 적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3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왜선 31척을 격퇴하였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순신 명량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안위 명량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김응함 명량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해남명량대첩비 명량대첩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해남명량대첩비 이민서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해남명량대첩비 이정영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해남명량대첩비 김만중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명량대첩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이은상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손재형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1. 민족기록화팀 촬영 (2017년 04월 26일)
  2. 민족기록화팀 촬영 (2017년 04월 26일)
  3. 민족기록화팀 촬영 (2017년 04월 26일)
  4. 민족기록화팀 촬영 (2017년 04월 26일)
  5. 민족기록화팀 촬영 (2017년 04월 26일)
  6. 민족기록화팀 촬영 (2017년 04월 26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명량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명량대첩", 『두피디아』online, 두산백과.
    • "명량해첩", 『위키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