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심
혜심(慧諶) | |
대표명칭 | 혜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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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慧諶 |
생몰년 | 1038(정종 4)-1096(숙종 1) |
시호 | 진각(眞覺) |
호 | 무의자(無衣子) |
휘 | 혜심(慧諶) |
탑호 | 원소(圓炤) |
자 | 영을(永乙) |
성씨 | 최씨(崔氏) |
속명 | 식(寔) |
출신지 | 전라남도 화순 |
승탑비 |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은 명종 8년 무술년(1178년) 전남 나주 화순현(羅州和順縣)에서 태어났다. 혜심은 그의 휘(諱)이고, 속성(俗姓)은 최씨(崔氏), 이름은 식(寔), 자(字)는 영을(永乙)이며, 진각국사(眞覺國師)는 그의 시호(諡號)이다. 그는 자신을 무의자(無衣子)라 하여 걸림 없는 인생을 노래하였다. 그의 아버지의 휘(諱)는 완(琬)이고, 어머니 배씨(裴氏)이다. 혜심의 아버지는 향공진사(鄕貢進士)였다. [1] 혜심의 태몽은 일종의 예지몽으로써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가 ‘태어났을 때 탯줄을 여러 겹으로 감아 마치 가사를 메고 있는 것과 같았다’는 점은 ‘가사’가 출가한 승려가 입는 법의(法衣)임을 참작했을 때 탯줄을 가사처럼 두르고 있었다는 점 또한 혜심이 승려의 삶을 살아갈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2]
출가수행
일찍이 출가를 원했던 혜심은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유학에 힘을 썼다. 비록 지방 향리 출신의 부친이었지만 일찍 돌아가심으로 인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사람은 외아들 혜심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에 승안(承安) 6년 신유년, 그의 나이 24세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3] 어머니가 죽자, 당시 조계산(曹溪山)에서 수선사를 만들어 교화 활동을 하고 있던 지눌(知訥)에게 가서 어머니의 재(齋)를 올린 다음,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힘써 정진하였으며, 지눌은 혜심의 재능을 아꼈다.[4]
활동
불교에서는 스승이 제자를 관찰하고 시험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이 인정될 때 인가(印可)를 통하여 법을 전한다. 지눌이 혜심에게 부채를 전하므로 그의 깨달음을 인정한 것이 된다.[5]
입적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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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 김방룡, 「진각 혜심의 선사상 체계와 불교사적 의의」, 『한국선학』 40, 2015, 199-234쪽.
- 김위석, "혜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재현, 혜심의 선사상과 간화, 철학 78, 2004, 29-49쪽.
- 이규보,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의 비명", 「비명(碑銘)ㆍ묘지(墓誌)」, 『동국이상국집』 35. 온라인 참조: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의 비명", 동국이상국집,
『한국고전종합DB』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 전행욱, 『수선사 연구』,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 정성본, 진각국사 혜심의 간화선 연구, 보조사상 23, 2005, 71-136쪽.
- 진성규, 「진각국사 혜심의 수선사활동」, 중앙사론 5, 1987, 1-60쪽.
- 진성규, 『고려후기 진각국사 혜심 연구』, 중앙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6.
- 최은희, 「교육의 관점에서 본 진각국사 혜심의 일생」, 『동아시아불교문화』 17, 2014, 237-2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