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긍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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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6일 (토) 01:53 판 (시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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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양(兢讓)
BHST Monk1.png
대표명칭 긍양
한자 兢讓
생몰년 878(헌강왕 4)-956(광종 7)
시호 정진(靜眞)
탑호 원오(圓悟)
이칭 백암화상(伯巖和尙), 봉종대사(奉宗大師), 증공대사(證空大師)
성씨 왕씨(王氏)
출신지 충청남도 공주
승탑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
승탑비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정의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정진대사 긍양靜眞大師 兢讓)은 878년(헌강왕 4)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왕씨(王氏)로 할아버지는 숙장(淑長), 아버지는 양길(亮吉)이고,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긍양의 고조와 증조부 때부터 군읍(郡邑)의 토호였으므로, 집집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1]

Quote-left.png 대사의 휘는 긍양(兢讓)이요, 속성은 왕씨(王氏)로 공주 출신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숙장(淑長)이고, 아버지는 양길(亮吉)이니, 모두 인(仁)을 머리에 이고 의(義)를 실천하며 자신을 통달하려고 노력하였다. 덕(德)을 쌓으며 공덕을 풍부히 하였으므로, 그 음덕(蔭德)이 멀리 자손에까지 끼쳤다. 공무(公務)를 봉직함에는 사심(私心)없이 노력하였고, 청렴결백함은 비길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주리(州里)에서 장자(長者)라는 이름으로 존경하였고, 원근(遠近)에는 현인군자(賢人君子)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고조와 증조부 때부터 모두 군읍(郡邑)의 토호로서 집집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그들의 행적은 여기에 싣지 않는다. 어머니는 김씨니, 가정과 사회(社會)에 끼친 공이 그를 필적(匹敵)할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부도(婦道)에 있어서도 규범(規範)이 있어 모범적인 주부였다. 머리를 잘라 팔아서 아들이 초대한 친구를 접대한 고사(故事)를 본받았으며,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짜던 베틀의 씨실과 날실을 모두 잘라서 아들이 중단한 공부를 독려한 것과 같이 자녀를 교육하였다. 따라서 불법승 삼보를 신봉하고, 시부모에게도 극진히 효도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탄생설화

긍양의 어머니는 어느 날 밤 별이 흘러 와서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다.[2]

Quote-left.png 어느 날 밤에 별이 흘러 와서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 크기가 독만하고 빛은 황금색으로 매우 윤택하였다. 이 같은 태몽으로 인하여 임신하였다. 그 후부터 고기와 오신채(五辛菜)는 일절 먹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재계(齋戒)를 가지면서 계속 태교(胎敎)에 정성을 다하였다. 만삭이 되어 탄생하니, 대사는 타고난 모습이 특이하고 신채(神彩)가 영기(英奇)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유년기

긍양은 타고난 모습이 특이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나이든 사람과 같이 점잖았다.[3]

Quote-left.png 오색(五色)으로 찬란한 때때옷을 입을 때로부터 죽마(竹馬)를 타고 유희하는 나이에 이르러 비록 아이들과 장난을 하나, 마치 노성(老成)한 사람과 같이 음전하였다. 앉을 때에는 반드시 가부(跏趺)를 맺었고, 다닐 때에는 모름지기 합장하였다. 모래를 모아 불단(佛壇)을 만들고, 불상(佛像)을 모방하여 모시고는 향기로운 잎과 꽃을 따서 불전(佛前)에 공양을 올리곤 하였다. 글방에서 공부할 나이가 되어서는 날마다 경(經)을 수지 독송하였다. 시(詩)와 예(禮)는 이정(鯉庭)에서 배웠고, 강론(講論)은 전사(鱣肆)에서 들었다. 자못 절묘하게 뛰어난 세 가지 분야인 삼절(三絶)에 정통하여 그 이름이 모든 학파(學派), 곧 구류(九流)에 가득하였다. Quote-right.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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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수행

긍양은 공주 남혈원(南穴院)으로 가서 여해선사(如解禪師)의 제자가 되어 출가하였다.

Quote-left.png 어느 날 간절히 자모(慈母)와 엄부(嚴父)에게 입산수도할 수 있도록 허락을 청하였다. 본주(本州) 남혈원(南穴院)으로 가서 여해선사(如解禪師)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고 득도(得度)하였다. 그 곳에서 은사스님을 모시면서 뜻은 수도(修道)에 전념하였으니,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다 하였다. 학문에 날로 정진하여 실로 그 공로(功勞)가 배증(倍增)하였으니, 누가 그의 수행이 부진하다 하겠는가. 망치로 종을 조금만 쳐도 마치 큰 독이 웅장하게 울리는 듯 하였다. 이로부터 우주를 비추는 혁혁(赫赫)한 태양 빛과 같은 선종(禪宗)이 있는 줄 안 후에는 밤에만 반짝이는 별 빛과 같은 교종(敎宗)의 길을 단념하고 산문(山門)을 나와서는 심사방도(尋師訪道)하면서 사방(四方)의 중생을 지도하였고, 수행함에는 삼종익우(三種益友)를 선택하였다. Quote-right.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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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7년(진성왕 10) 긍양은 계룡산 보원정사(普願精舍)에서 계를 받았다.

Quote-left.png 드디어 건녕(乾寧) 4년 계룡산 보원정사에서 지범(持犯), 즉 비구계를 받았다. 그 후로부터는 좌우(坐雨), 즉 우기(雨期)인 여름결제 동안 정진하는 마음은 더욱 견고해졌고, 구름 덮인 산중(山中)에서 수도하려는 생각은 갈수록 간절하였다. 엄격하게 계주(戒珠)를 보호하되 한점의 하자도 어김이 없으며, 예리하게 지혜의 칼을 갈아 조금도 무디어짐이 없었다. 능히 계초비구(繫草比丘)와 같은 굳은 마음을 가져서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벗어나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오직 법문(法門)을 듣기 위해서는 천리(千里)도 멀다 하지 아니하였다. Quote-right.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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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긍양은 서혈원(西穴院)으로 가서 양부선사(楊孚禪師) 밑에서 수행하였다.

Quote-left.png 서혈원(西穴院) 양부선사(楊孚禪師)를 친견할 때 선사는 반기는 청안(靑眼)을 크게 뜨고 맞이하여 간절한 적심(赤心)으로 접대하였으니, 마치 유[由 : 자로(子路)]가 비파를 가지고 구[丘 : 공자(孔子)]의 문하(門下)에서 튕기는 것과 같았다. 대사는 이미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재능(才能)이 있었고, 혹은 재삼(在三)의 예(禮)를 펴면서 양부선사를 섬김에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정진(精進)하였다. Quote-right.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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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법유학

긍양은 899년(효공왕 3) 당나라에 건너가 석상경제(石霜慶諸)의 제자인 곡산도연(谷山道緣)을 친견하였다. 긍양은 도연에게 경제의 가르침에 대해 물었는데, "대대로 일찍이 계승되지 않았다."는 도연의 대답에 크게 깨달았다. 그 뒤,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서 오대산으로 가는 도중 관음사에 머물렀는데, 갑자기 얼굴에 독창이 생겨 치료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홀로 열반당(涅槃堂)에 머물면서 일심으로 관음염불을 하는데, 한 노승이 나타나 숙원을 가진 사람의 원한 갚음이라 하면서 정성껏 씻어주었는데 그 후 독창이 깨끗이 나았다. 그 뒤, 오대산·운개산(雲盖山)·동산(洞山) 등지를 순례한 뒤 924년(경애왕 1) 전주(全州) 희안현(喜安縣, 전북 부안군) 포구로 귀국하였다.[4]

Quote-left.png 곡산(谷山)으로 가서 도연화상(道緣和尙)을 친견하였으니, 그는 석상경제(石霜慶諸)의 수제자였다. 대사가 묻되 “석상 종지(宗旨)의 적적(的的)한 대의(大意)는 어떠한 것입니까?” 화상이 대답하되 “대대로 일찍이 전승(傳承)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사가 그 말이 끝나자 크게 깨달았으니, 묵묵히 현기(玄機)를 통달하고 비밀리 법통(法統)을 전해 받았다. 밝기로는 마치 진시황제(秦始皇帝)의 거울을 비추는 것과 같았고, 깊기로는 황제(黃帝)의 현주(玄珠)와 같았다. 일진(一眞)을 투철히 궁구하고 더욱 삼매(三昧)를 닦아서 마치 푸른빛이 남초(藍草)보다 더하고, 붉은 색(色)이 꼭두서니보다 더욱 붉은 것과 같았으며,구슬과 불빛이 서로 비추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대사는 선문(禪門)의 생용(笙鏞)으로 군림하였으니, 어찌 규규(赳赳)함 뿐이었겠는가. 쟁쟁(錚錚)한 거목(巨木)이라 할 수 있다. 대사는 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화상(和尙)에게 바쳤다.

10인의 영재(英材)가 함께 급제에 응시하여 합격이 공고되어 출세(出世)하였으나, 오직 한 사람만은 낙제(落第)하였고 아홉 사람은 영광스럽게 출세하였다.

도연화상이 이를 보고 경탄해 마지 아니하였으며, 삼생송(三生頌)을 대중들로 하여금 음화(吟和)하도록 허락하였다. 대사는 용기를 길러 자신(自身)을 수양하여 남에게 끼칠 여력(餘力)이 있었고, 인(仁)을 당하여서도 사양하지 아니 하였으며, 붓을 잡아서는 이치를 분석하였다. 이 봉조(鳳藻)인 금옥(金玉)과 같은 훌륭한 문장(文章)을 모아 책을 엮었으니 구절구절마다 귀중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러한 문장은 벽운곡(碧雲曲)이 백운곡(白雲曲)보다는 고상하지만, 어찌 이것이 구경(究竟)의 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이미 책으로 엮어 세상(世上)에 유전(流傳)되므로 이 비문(碑文)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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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활동

927년(경순왕 1)에는 스승인 양부선사(楊孚禪師)가 주석하였던 강주(康州) 백엄사(伯嚴寺)에 머물렀다.[5]

Quote-left.png 다시 강주(康州) 백엄사(伯嚴寺)로 옮겼으니, 이곳은 서혈(西穴)의 양부선사(楊孚禪師)가 암자를 수축하여 주석(住錫)하던 곳이다. 선사(先師)인 양부스님이 입적하였다. 법장(法匠)이 열반하니 문인들이 앙모하여 슬퍼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재가불자들은 참으로 의지할 신앙대상이 없음을 탄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름이 자욱한 계곡과 안개 덮인 고개들의 사계절(四季節)의 변태상은 높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서로 부딪히는 운율(韻律)과 백뢰(百籟)의 화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곳은 마치 여산 동림(東林)의 수려함과 같아서 서역(西域)의 종지(宗旨)를 전수할 만한 곳이었다. 천성(天成) 2년 대사는 그 곳으로 옮겨 주석하였다. 이곳에 법경(法鏡)을 높이 걸어놓고 항상 닦고 비추어 무애융통하였으며, 선용(禪鏞)을 높은 틀에 달아 놓고 치기를 기다림과 같았으니, 메아리의 응함이 연(緣)을 따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을 귀의하게 하였고, 천지사방(天地四方)의 중생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였다. 도(道)를 묻는 자가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어 법문(法門)을 들으려는 불자(佛子)들의 발꿈치가 서로 닿았으니, 마치 병목(並目)처럼 나란히 하였다. 이와 같이 대사의 덕화가 해우(海隅)에 두루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명성(名聲)이 일역(日域)을 진동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경애왕은 긍양의 덕을 찬탄하여 서신과 함께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호를 내려주었다.[6]

Quote-left.png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이 멀리서 스님의 현장(玄杖)을 의지하여 나라의 정강(政綱)을 정돈하려 하였으며, 비록 상법(像法)과 계법(季法)시대에 해당하나, 선라(禪那)의 교를 받들려 원을 세웠다. 사신을 보내 편지를 전하되, “공손히 들으니 대사께서는 일찍이 바다를 건너 당(唐)나라로 가서 멀고도 험난한 조계(曹溪)에 이르러 도연화상(道緣和尙)으로부터 심중(心中)의 비인(秘印)을 전해 받고, 함하(頷下)의 명주(明珠)를 찾으셨으며, 지혜의 횃불을 계속 밝혀 미혹한 중생들의 앞길을 인도하였으니, 선하(禪河)는 이로부터 막힘없이 흐르게 되었고, 법산(法山)이 이에 우뚝 솟게 되었습니다. 계족산의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있는 가섭존자의 현풍(玄風) 이 구림(鳩林)의 먼 곳까지 전파되기를 바랐으니, 이 어찌 일방(一邦)의 의뢰(依賴)가 될 뿐이겠습니까. 이같이 덕 높은 스님은 천재(千載)에도 한 번 만나기 어려운 일입니다”하고는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별호를 올렸다. Quote-right.png
출처:


긍양은 935년(경순왕 9) 희양산으로 가서 봉암사를 중창하였고, 이곳에 머물면서 선실(禪室)을 구축하고 제자들을 가르쳐 희양산문을 확립하였다.[7]

Quote-left.png 청태(淸泰) 2년에 이르러 생각하되 도를 넓히기 위해 좋은 산을 선택하기로 결심(決心)하고 행장을 준비하고는 출발을 지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덮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 때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대사에게 이르되 “스님께서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꼭 가시려면 먼 곳으로는 가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를 지켜 본 대중들은 모두 이상히 여겨 떠나지 말고 계시라고 간청하였으나, 대사는 굳은 의지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문득 떠났다. 얼마쯤 가다가 도중에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약 30리를 갔는데, 또 한 마리의 호랑이가 중로(中路)에서 영접하고 인도하되 마치 양 날개와 같이 좌우로 호위하였다. 이와 같이하여 희양산 중턱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 이미 이곳까지 왔다가 물러간 자취를 보고서야 비로소 되돌아 왔다. 대사는 봉암사(鳳巖寺)에 자리를 정하고는 기꺼움이 더하여 작약(雀躍)하였다. 그리하여 산꼭대기에 올라 산 너머의 배면(背面)을 살펴보니 천층(千層)으로 된 푸른 봉우리와 만첩으로 이루어진 붉은 절벽은 산적의 방화로 불탄 흔적이 마치 괴겁(壞劫)때 타버린 겁회(劫灰)가 날아 떨어진 박암(撲巖)과 똑같았다. 그러나 중첩된 봉우리와 겹겹의 계곡은 전혀 변천(變遷)한 모양이 없었으며, 불달(佛闥)과 승방 자리는 반쯤은 가시덩굴로 뒤엉켜 있었다. 우뚝 솟은 산은 마치 거북이 비석을 지고 있는 듯 선덕(禪德)의 비명과 같았고, 험준하고 웅장한 상봉우리는 거대한 불상(佛像)인데, 신령스러운 광명(光明)은 항상 빛나고 있었다. 이미 율수(聿修)할 뜻을 굳게 가졌으니, 어찌 이 곳에 절을 중창할 뜻을 사양할 수 있었겠는가. 기원정사를 세울 때 가섭(迦葉)존자가 직접 진흙을 밟던 일을 추모하고, 목련존자가 서다림(逝多林)의 도량을 청소하였던 일을 본받아 선실(禪室)을 구축하고 학도(學徒)를 지도하되, 혹한과 혹서에도 쉬지 않았으며, 문법 대중 또한 대와 갈대처럼 문전(門前)에 열(列)을 이루었다. 대사(大師)는 사람을 가르침에 권태(倦怠)로워함이 없이 항상 중생을 이익케 하였다. 그의 지도이념은 상인(商人)들로 하여금 급히 화성(化城)을 버리게 하였고, 궁자(窮子)들은 모두 보배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니, 빽빽이 열을 지은 전단향나무가 향기를 풍기는 듯하고, 뜰에 가득한 연꽃이 만개한 듯 하였다. 선풍을 크게 떨치고 법왕(法王)의 가르침을 홍천하였으며, 평등한 은혜로 두루 구제하고, 덕은 넉넉하여 모든 중생과 함께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긍양은 스스로 개경에 가서 태조를 만났다. 이때 태조는 긍양과 더불어 대장경(大藏經)을 사경하여 개경과 서경에 나누어 안치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였다. 정종에게 마납가사(磨衲袈裟) 1벌과 사경한 의희본(義熙本) 『화엄경(華嚴經)』 8질을 받기도 하였다.[8]

Quote-left.png 이 무렵 대사는 곡판(鵠版)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호계(虎溪)를 나와 백족(白足)을 움직여 보행으로 마치 날으는 듯 걸었으며, 바람에 나부끼는 설미(雪眉)는 보는 이로 하여금 환희심을 내게 하였다. 개성을 향하여 중원부(中原府)에 이르렀는데, 그 곳 연주원(鍊珠院)의 원주(院主)인 예백(芮帛)스님은 항상 능가경을 독송하여 하루도 쉬지 않았다. 이 날 밤 꿈에 동자 신선이 솔도파(窣堵波)의 꼭대기로부터 합장하고 내려오면서 말하기를 “내일 어떤 나한(羅漢)스님이 여기를 지나갈 터이니, 미리 공양(供養)을 준비해 두었다가 지극히 모시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대중을 모아놓고 지난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하니, 대중들이 모두 기이한 일이라 경탄하면서 도량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저녁때에 이르러 과연 대사가 연주원에 당도하였다. 경사(京師)에 이르러 태조가 대사를 친견하고 경이(驚異)하게 여기고 꿇어앉아 공경하면서 법을 전해 받은 근원을 물으니,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유창하게 대답하였다. 태조는 스님과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면서 조용히 스님과 대화하되 “현장법사가 서역(西域)에서 불교를 유학하고 함경(咸京)으로 돌아온 후 많은 경전을 번역한 것이 보장(寶藏에) 비재(秘在)하고 있습니다. 정원(貞元) 이래로 번역된 경론(經論) 이 가장 많으므로 근세(近歲)에 민중(閩中)과 구녕(甌寧)지방에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 진본(眞本)을 구입하여 항상 전독(轉讀)하며 홍선(洪宣)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병화(兵火)로 인하여 모두 타버렸으니, 지금은 다행히 전쟁이 끝났으므로 불교를 진작하고자 하여 대장경 1부를 다시 사경(寫經)하여 나누어 양도(兩都)에 안치하려 하니 스님의 의향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물었다. 대사가 답하되 “이는 비록 유위(有爲)의 공덕이긴 하지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이룩하는데 큰 공덕이 되오니, 경전을 홍포한 인연으로 능히 부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불은(佛恩)과 왕화(王化)가 길이 빛나되 천장지구(天長地久)와 같으며, 복됨이 끝이 없고 공명(功名)이 영원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일심(一心)으로 공경하여 사사(四事)로 정성껏 모시되, 혹은 어전(御殿)을 열어 놓고 청법하기도 하며, 혹은 스님이 계시는 감우(紺宇)인 사원으로 찾아가서 문안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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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951년(광종 2) 봄 긍양은 왕의 친서를 받고 개경에 갔다. 광종은 긍양을 영접하여 호국제석원(護國帝釋院)에 모신 뒤 특별히 공양을 올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도(政道)에 대해 물었고, 그 해 4월에는 사나선원(舍那禪院)으로 이주하게 하고 '증공대사(證空大師)'라는 호를 올렸다.[9]

Quote-left.png 멀리서 대사를 흠모하다가 친히 혜안(慧眼)인 스님을 친견하고자 광덕(光德) 2년 봄에 사신을 보내 친서를 전달하니, 그 내용인 즉 반드시 서로 만나기를 원하여 왕림하시길 바라는 마음을 간절히 하였다. 대사도 또한 동림(東林)을 나와 북궐(北闕)로 가서 임금을 배알하기로 결심하고 정인(淨人)에게 아침 공양을 재촉하였고, 모시고 갈 시자에게 행장을 빨리 꾸리도록 했다. 이 때 법당 한쪽에 걸려있던 북이 갑자기 스스로 울렸는데, 그 소리가 감감(坎坎) 하여 마치 우뢰와 같이 우렁찼으며, 또한 깊은 골에서 울려오는 듯하였다. 이를 들은 대중은 모두 놀라서 한결 같은 마음으로 떠나심을 만류하였으나, 대사는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서울로 향해 가던 중 과연 궁중(宮中)에서 보낸 사신을 만났다. 대사를 따르는 선려(禪侶)는 월악산(月岳山)을 지나오고, 왕이 보낸 사신 일행은 한강(漢江)을 건넜으니, 이미 우연히 만남을 기꺼워하여 준순(逡巡)의 물러남을 의론하지 않았다. 함께 기전(圻甸)의 경계까지 이르니, 왕이 보낸 일행이 교외(郊外)까지 나와 예를 갖추고 기다리다 영접하였다. 제사(諸寺)의 승도(僧徒)와 조정에 가득한 신재(臣宰)로 하여금 홍진(紅塵)을 무릎쓰고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선 호종(護從)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복잡한 거리를 보행(步行)으로 수행하게 하였다. 개성에 있는 호국(護國) 제석원(帝釋院)에 이르러 투숙하였다. 다음 날 아침 임금이 궁중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별도로 깨끗한 방을 마련하여 친히 스님을 영접하고 특별히 공양을 올리고 소박하게 찬양하는 정성을 폈으며, 대사에게 나라 다스리는 정도(政道)를 물었다. 대사도 임금을 흠모하여 이미 기울어진 운세(運勢)를 반드시 만회시키려고 하였다. 망언(忘言)의 언(言)을 말하고 무설(無說)의 설(說)을 설하였으니, 어찌 이것이 수도하는 데만 도움이 될 뿐이겠는가. 또한 능히 정치 풍토를 쇄신하여 국민을 개제(開濟)하는 공을 넓혀 마침내 귀의하는 정성에 보답하였다. 그 해 4월 사나선원(舍那禪院)으로 이주(移住)하게 하고, 마납가사(磨衲袈裟) 일령(一領)을 보내드리고 겸하여 공양을 베풀되 정성스럽지 않음이 없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과인(寡人)이 어릴 때 왕위(王位)에 올라 기무(機務)를 보는 여가를 틈타 사적(史籍)을 찾아보니, 옛날 황제헌원씨로부터 주발(周發)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보(師保)를 두어 자문을 받고 왕의 잘못된 시정(施政)을 광정(匡正)하려 하였으므로, 이를 군(君)과 민(民)이라 하였으며, 사신(師臣)[신하를 스승으로 섬기는 것]인 즉 군왕(君王)이요, 우신(友臣)[신하를 벗으로 여기는 것]인 즉 패왕(霸王)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스님은 그 고상(高尙)한 법덕으로 널리 이익(利益)을 끼쳤다고 할 만하였다. 이제 희양대사를 친견하니, 참으로 화신(化身)으로 나타난 보살이시니, 내 어찌 스승과 제자의 예(禮)를 맺고자 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경들의 뜻은 어떤가”하고 물으니 중신(重臣)들이 “모두 지당하다”하고 한 사람도 이의(異義)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이 양가승총(兩街僧摠)인 법여대덕(法輿大德)과 내의령(內議令)인 태상황보(太相皇甫) 등에게 명하여 선경(禪扃)에 보내어 왕의 뜻을 전달하고, 다시 중사(中使)를 시켜 비단으로 사방에 깃을 둘러 만든 마납가사(磨衲袈裟) 일령(一領)과 아울러 머리에서부터 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장신구를 송증(送贈)하였다. 그 후 상(上)께서 문·무(文·武)인 양반(兩班)과 승관(僧官)을 거느리고 잠깐 주관(珠宮)을 나와 친히 금지(金地)로 왕림하여 손에 작미향로(鵲尾香爐)를 들고 용이(龍頤)를 면대(面對)하고는, 한림학사이며 태상(太相)이고 수병부령(守兵部令)인 금악(金岳)을 불러 조서를 선포하되, “옛날 진(晉)나라 안제(安帝)임금은 혜원법사(慧遠法師)를 만나 지극한 마음으로 받들었고, 오왕(吳王) 손권(孫權)은 강회승대사(康僧會大師)를 친견하고 정성을 다하여 귀의(歸依)하였으니, 인간과 천상(天上)에 왕성한 전적(傳跡)이 고금古今을 통해 길이 찬미할 만한 일이다. 과인(寡人)이 비록 덕이 왕철(往哲)에 비해서는 부끄럽지만, 뜻은 불교를 신봉하여 힘써 외호(外護)하고 마음가짐을 상상(愓愓)하게 하였다. 대사는 우담발라화꽃이 한번 나타난 것과 같이 희유하며, 혜일(慧日)은 거듭 밝아서 연꽃 같은 스님의 눈을 보면 번뇌가 저절로 사라지고, 과일빛과 같은 주홍색 입술을 보면 진노망상(塵勞妄想)이 문득 쉬게 된다. 다생(多生)의 인연으로 금생(今生)에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감히 지극한 마음으로 우러러 맑은 도덕을 듣고, 스승으로 모시는 예(禮)를 펴고자 합니다. 여러 겁(劫) 동안의 인연이 이루어지길 희망하여 몸소 송궐(松關)에 나아가 스님의 면전(面前)에서 일편단심을 표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자비로 비추시고, 구부려 과인(寡人)의 정성을 받아들이소서. 청컨대 스님의 도(道)를 더욱 빛나게 하고자 공경히 증공대사(證空大師)란 존호(尊號)를 드리니, 이 인연으로 겁겁생생(劫劫生生) 태어나는 곳마다 지혜의 기치를 반연하여 불법(佛法)의 바다에 유희하려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여쭙니다”라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입적

긍양은 953년(광종 4) 가을 봉암사로 돌아갔고, 3년 후인 956년(광종 7)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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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은 정진대사(靜眞大師)라는 시호와 원오지탑(圓悟之塔)이라는 탑명을 하사하였으며, 영정 1위를 제작하고 공양을 베풀었다. 탑비는 965년(광종 16)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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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문 개창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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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78년 긍양 출생
897년 긍양은 계룡산 보원정사에서 계를 받았다.
899년 긍양은 당나라로 건너갔다.
924년 긍양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였다.
927년 긍양합천 백엄사에 주석하였다.
935년 긍양문경 봉암사를 중창하고, 희양산문을 확립하였다.
951년 봄 긍양고려 광종의 친서를 받고 개경에 갔다.
951년 4월 긍양개성 사나사에 주석하였으며, 고려 광종으로 부터 '증공대사(證空大師)'라는 호를 받았다.
953년 긍양문경 봉암사로 돌아가 주석하였다.
956년 긍양 입적
965년 긍양의 탑비가 건립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2.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3.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4. 김위석, "긍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6. 김위석, "긍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8.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9.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문헌

  •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2: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이지관,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440-513쪽.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긍양",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김위석, "긍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긍양",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