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희
천희(千熙) | |
대표명칭 | 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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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Cheonhui |
한자 | 千熙 |
생몰년 | 1307(충렬왕 33)-1382(우왕 8) |
시호 | 진각(普照) |
호 | 설산(雪山) |
휘 | 천희(千熙) |
탑호 | 대각원조(大覺圓照) |
출신지 | 흥해(興海) |
승탑비 |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천희는 1307년(충렬왕 37) 5월 21일 경상도 흥해군(慶尙道 興海郡)에서 출생했으며, 휘는 천희(千凞), 호는 설산(雪山), 어머니의 성(姓) 최씨(崔氏)이다.[1]
출가수행
천희는 1319년(충숙왕 6) 13살 때 화엄종 사찰이었던 반룡사(盤龍寺)에서 일비(一非) 대사를 은사로 하여 출가하였다. 당시 반룡사는 경상도 고령에 있었던 사찰로 14세기에는 해인사 못지않게 불교계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후 김생사(金生寺), 덕천사(德泉寺), 부인사(符仁寺), 개태사(開泰寺) 등 10개의 사찰을 유람하면서 수행과 중생교화에 전념하였다.[2]
스님의 나이 13살 때 화엄종(華嚴宗) 반룡사(盤龍社) 주지인 일비대사(一非大師)를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사미(沙彌)스님이 되었다. 19세에 상품선(上品選)에 합격하였으며, 그로부터 금생사(金生寺)·덕천사(德泉寺)·부인사(符仁寺)·개태사(開泰寺) 등 10여 개 사찰을 두루 역주(歷住)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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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법유학
소백산(小伯山)에 있을 때, 13세기 후반 크게 활약한 중국 원(元)나라 승려인 몽산(蒙山) 덕이(德異) 꿈속에 여러 번 나타나 법의(法衣)를 전해주었으며, 금강산과 오대산에 머물 때에도 같은 꿈을 꾸자 중국 유학길을 떠났다. [3]
천희는 늦은 나이인 58세에 배를 타고 중국 유학길에 올라 중국 항주(杭州)에 도착하여 곧바로 휴휴암(休休菴)에 이르러 몽산(蒙山)의 진당(眞堂)에 참배하고 몽산이 머물렀던 방의 자물쇠를 열고 몽산(蒙山)이 남긴 주봉(柱棒)과 불자(拂子)를 친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강절행성(江浙行省)의 승상(丞相)인 태위(太尉) 장사성(張士誠)의 동생 등과 대면하였으며, 당시 문서가 들어있는 궤(櫃)를 열자 군도들이 삼보를 파괴하여 절이 멸망할 것이라 하자 스님을 해하려고 하였으나 그만 두고 몽산(蒙山)의 의물(衣物)을 두고 떠났다.[4]
천희는 성안사(聖安寺) 만봉(萬峯)을 찾아갔으나 방에서 3일 동안 나오지 않자 만봉의 병을 간호해주고 가사(袈裟)와 선봉(禪棒)을 전해 받고 성안사(聖安寺)를 떠나 오강(吳江, 吳淞江)에 도착하였다. 당시 마씨(馬氏) 성을 가진 스님이 만봉스님이 전해준 것을 빼앗으려고 오강까지 따라왔으나 미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5]
귀국 및 활동
1366년(공민왕 15) 7월에 고려로 귀국하였다. 천희가 귀국하여 불복장(佛福藏)에 머물고 있을 때 공민왕이 방문하였으며, 치악산에 잠시 은둔하다가 동해를 순방하고 낙산사(洛山寺)에 가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상서(祥瑞)를 감득하였다고 한다. 천희가 1367년 정월에 다시 치악산으로 돌아와 머물고 있을 때 공민왕이 3번이나 사신(使臣)을 보내어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러자 공민왕은 1367년 5월에 천희를 국사(國師)로 추대하고‘大華嚴宗師 禪敎道摠攝 傳佛心印 大智無碍 性相圓通 圓應尊者’라는 존호(尊號)를 내렸으며, 국사부(國師府)를 설치하고 관부(官府)와 요속(寮屬)을 두고 인장(印章)과 법의(法服)을 하사하였다. 이와 같이 공민왕은 천희가 1366년 원나라에서 귀국한 직후 국사에 책봉한다. 그리고 국사(國師)의 아버지는 이판서(理判書)로 추증(追贈)하고, 그의 고향인 흥해군(興海郡)은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고려시대 국사 출신 고향을 승격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6]
공민왕이 1370년 9월 왕사 나옹을 청하여 광명사(廣明寺)에서 선교양종을 모아 공부선절목(功夫選節目)을 고시할 때 천희는 증명법사(證明法師)로 참석하였으며, 선과법회(選科法會)가 끝난 이후 경천사(敬天寺)에 주석하였다. 이후 천희는 개경을 떠나 금강산을 순례하였으며, 공민왕이 5월 사신을 보내 개성으로 환도할 것을 청하자 다시 개성으로 돌아왔으나 가을에 공민왕에게 간청하여 치악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372년에는 화엄종 대표 사찰인 부석사(浮石寺)에 주석하면서 전당(殿堂)을 중수하였다.[7]
입적
그리고 천희는 1382년 고려 멸망 직전인 6월 16일 창성사(彰聖社)에서 세수 76세, 법랍 63세로 입적하였다. 이에 우왕이 시호(諡號)를 진각국사(眞覺國師), 탑호(塔號)를 대각원조탑(大覺圓照塔)이라 내렸으며, 우왕이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비문을 찬하게 하자 문인(門人)들이 스님의 행장(行狀)을 적어 올렸다. 비문이 완성된 1386년 이색(李穡)이 비문을 완성하자, 1월에 문인(門人) 개태사(開泰寺) 주지(住持) 묘지무애(妙智無碍) 통조대사(通照大師) 충술(冲述) 등이 탑비(塔碑)를 건립하였다.[8]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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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104쪽.
- ↑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104쪽.
- ↑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104쪽.
- ↑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104쪽.
- ↑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104쪽.
- ↑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104-105쪽.
- ↑ 105쪽
- ↑ 105쪽
참고문헌
- 김상현, 「眞覺國師 千熙의 佛敎史的 位相」,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57-66쪽.
- 최연식, 「眞覺國師 千熙의 生涯와 思想」,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67-90쪽.
-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91-116쪽.
- 박상국, 천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지관, "수원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488-505쪽.
-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