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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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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0일 (일) 23:5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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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희(千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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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천희
영문명칭 Cheonhui
한자 千熙
생몰년 1307(충렬왕 33)-1382(우왕 8)
시호 진각(普照)
설산(雪山)
천희(千熙)
탑호 대각원조(大覺圓照)
출신지 흥해(興海)
승탑비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천희는 1307년(충렬왕 37) 5월 21일 경상도 흥해군(慶尙道 興海郡)에서 출생했으며, 휘는 천희(千凞), 호는 설산(雪山), 어머니의 성(姓) 최씨(崔氏)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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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휘는 천희(千熙)요 호는 설산(雪山)이며 흥해(興海) 출신이다. (결락) 구(具) 전리판서(典理判書) 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니, 최씨가 꿈에 큰 배를 보았는데 많은 스님들이 범패(梵唄)를 하고 있었고, 그 물이 대문(大門) 앞에까지 이르러 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임신하였다. 만삭이 됨에 또 백학(白鶴)이 그의 복부를 쪼아 청첩가사(靑帖袈裟)를 입은 한 스님이 뛰어나오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 후 대덕(大德) 정미년(丁未年) 5월 21일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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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가수행

천희는 1319년(충숙왕 6) 13살 때 화엄종 사찰이었던 반룡사(盤龍寺)에서 일비(一非) 대사를 은사로 하여 출가하였다. 당시 반룡사는 경상도 고령에 있었던 사찰로 14세기에는 해인사 못지않게 불교계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후 김생사(金生寺), 덕천사(德泉寺), 부인사(符仁寺), 개태사(開泰寺) 등 10개의 사찰을 유람하면서 수행과 중생교화에 전념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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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나이 13살 때 화엄종(華嚴宗) 반룡사(盤龍社) 주지인 일비대사(一非大師)를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사미(沙彌)스님이 되었다. 19세에 상품선(上品選)에 합격하였으며, 그로부터 금생사(金生寺)·덕천사(德泉寺)·부인사(符仁寺)·개태사(開泰寺) 등 10여 개 사찰을 두루 역주(歷住)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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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법유학

소백산(小伯山)에 있을 때, 13세기 후반 크게 활약한 중국 원(元)나라 승려인 몽산(蒙山) 덕이(德異) 꿈속에 여러 번 나타나 법의(法衣)를 전해주었으며, 금강산과 오대산에 머물 때에도 같은 꿈을 꾸자 중국 유학길을 떠났다. [3]

천희는 늦은 나이인 58세에 배를 타고 중국 유학길에 올라 중국 항주(杭州)에 도착하여 곧바로 휴휴암(休休菴)에 이르러 몽산(蒙山)의 진당(眞堂)에 참배하고 몽산이 머물렀던 방의 자물쇠를 열고 몽산(蒙山)이 남긴 주봉(柱棒)과 불자(拂子)를 친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강절행성(江浙行省)의 승상(丞相)인 태위(太尉) 장사성(張士誠)의 동생 등과 대면하였으며, 당시 문서가 들어있는 궤(櫃)를 열자 군도들이 삼보를 파괴하여 절이 멸망할 것이라 하자 스님을 해하려고 하였으나 그만 두고 몽산(蒙山)의 의물(衣物)을 두고 떠났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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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小伯山)에 있을 때, 또한 꿈에 몽산(蒙山)이 그에게 의법(衣法)을 전해주는 것을 보았다. 금강산과 오대산(五臺山)에서도 같은 꿈을 꾸었으니, 이것이 바로 남유(南遊)를 결심한 동기가 되었다. 갑진년(甲辰年) 가을 우리 스님께서 배를 타고 중국 항주(杭州)에 이르렀다. 내가 스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규보(跬步)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그리하여 스님께서 휴휴암(休休菴)에 이르렀다. 그 날 밤 몽산(蒙山)의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 곧 영각(影閣)에 방광(放光)함이 있었다. (결락) 인(人). 의발심이지(衣鉢心異之). 스님을 모시고 방장실(方丈室) 앞에 다다르니, 문에 자물쇠가 매우 견고(堅固)하게 잠겨져 있었다. 삼전어(三轉語)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스님께서 그 글을 읽고 설명하니 자물쇠에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문이 열렸다. 이를 본 대중(大衆)은 모두 숙연(肅然)하였다. 실중(室中)에 궤(樻)가 있는데, 사(師) (결락) 그 속에 주봉(柱棒)과 불자(拂子)가 있었다. 그것을 들어 나에게 주려고 하니 이를 본 대중들은 더욱 탄복하였다. 또 칠(漆)을 한 자그마한 궤가 있었는데, 이는 잠겨져 있지 않고 다만 상면(上面)에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여는 자는 하늘이 반드시 벌을 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절성(浙省)승상(丞相) 장대위(張大尉)의 제(弟) (결락) “그 속에 무엇이 보관되어 있습니까” 하였으므로 스님이 이르기를 “문서(文書)입니다”라 하였다. 또 묻기를 “지금 그것을 열어 볼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스님이 이르기를 “열어 볼 수 있습니다” 하고, 곧 열어보니 과연 2질(秩)의 문서가 있었다. 그 중 (결락) 하나에는 군도(群盜)가 삼보(三寶)를 파괴하여 마침내 절이 멸망(滅亡)할 것이라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를 본 승상(丞相)이 노(怒) (결락) “해외에서 온 사람을 죽인들 무슨 이익이 있으랴 나는 우리 불법(佛法)을 부지런히 배울 뿐이라” 하고, 받았던 몽산(蒙山)의 의물(衣物)을 그냥 두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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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희는 성안사(聖安寺) 만봉(萬峯)을 찾아갔으나 방에서 3일 동안 나오지 않자 만봉의 병을 간호해주고 가사(袈裟)와 선봉(禪棒)을 전해 받고 성안사(聖安寺)를 떠나 오강(吳江, 吳淞江)에 도착하였다. 당시 마씨(馬氏) 성을 가진 스님이 만봉스님이 전해준 것을 빼앗으려고 오강까지 따라왔으나 미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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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丙午年) 봄 만봉(萬峯)을 성안사(聖安寺)로 찾아 갔으나, 만봉은 3일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만봉(萬峯)이 이르기를 “고려노화상(高麗老和尙)이 (결락) 입시(入時)가 없거늘 어찌 출시(出時)가 있겠습니까” 하니, 만봉(萬峯)이 말하기를 “내가 병이 있으나, 누가 친절한 마음으로 나의 병을 간호(看護)해 주겠는가” 하였다. 스님께서 주먹으로 그의 등을 안마해 주었다. 그 날 밤 삼경(三更)에 만봉이 가사(袈裟)와 선봉(禪棒)을 전해주면서 이르기를 불문(不聞) (결락) 성안사(聖安寺)를 떠나 오강(吳江)에 이르니, 어떤 스님이 그곳에 머물기를 청(請)하였으나, 스님은 굳게 사양하고 떠났다. 만봉회상(萬峯會上)의 어느 스님이 만봉이 삼경(三更)에 스님에게 전해준 의(衣)·봉(棒)을 빼앗고자 이날 밤에 오강(吳江)까지는 따라왔으나, 승방(僧房)에는 미치지 못하고 되돌아갔으니, 그 스님의 속성(俗姓)은 마씨(馬氏)였다. 우는 소리를 듣고 (결락) 건너간 것이 분명하다. 오호라! 몽산(蒙山)이 휴휴암(休休庵)에서 방광(放光)하여 앞의 일을 현몽(現夢)으로 보여준 것이고, 만봉(萬峯)이 삼경(三更)에 전법(傳法)한 것은 후일(後日)을 경계한 것이다. 미래(未來)의 일을 훤히 내다보시고 묘(妙)하게 유촉(遺囑)하였으니, 스승과 제자간의 도(道)는 시간적인 고금(古今)과 공간적인 하이(遐邇)에 간단(間斷)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석씨지(釋氏之) (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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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귀국 및 활동

1366년(공민왕 15) 7월에 고려로 귀국하였다. 천희가 귀국하여 불복장(佛福藏)에 머물고 있을 때 공민왕이 방문하였으며, 치악산에 잠시 은둔하다가 동해를 순방하고 낙산사(洛山寺)에 가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상서(祥瑞)를 감득하였다고 한다. 천희가 1367년 정월에 다시 치악산으로 돌아와 머물고 있을 때 공민왕이 3번이나 사신(使臣)을 보내어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러자 공민왕은 1367년 5월에 천희를 국사(國師)로 추대하고‘大華嚴宗師 禪敎道摠攝 傳佛心印 大智無碍 性相圓通 圓應尊者’라는 존호(尊號)를 내렸으며, 국사부(國師府)를 설치하고 관부(官府)와 요속(寮屬)을 두고 인장(印章)과 법의(法服)을 하사하였다. 이와 같이 공민왕은 천희가 1366년 원나라에서 귀국한 직후 국사에 책봉한다. 그리고 국사(國師)의 아버지는 이판서(理判書)로 추증(追贈)하고, 그의 고향인 흥해군(興海郡)은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고려시대 국사 출신 고향을 승격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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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릉(玄陵)이 스님의 입중유학(入中遊學)을 위로하는 한편 더욱 존숭(尊崇)하였고 모든 사람들도 서로 앞을 다투어 먼저 친견하려 하였다. 스님은 치악산(雉岳山)에 잠시 은거(隱居)하다가 동해(東海)를 순방하고, 양양 낙산사(洛山寺)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방광(放光)하는 상서(祥瑞)를 감득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월에 다시 치악산으로 돌아왔다. 공민왕이 세 번이나 사신(使臣)을 보내어 스님을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스님은 비로소 5월에야 이르렀으므로 국사(國師)로 추대하고, 대화엄종사(大華嚴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傳佛心印) 대지무애(大智無碍) 성상원통(性相圓通) 복▨▨▨▨▨▨▨▨▨▨(福▨▨▨▨▨▨▨▨▨▨) 원응존자(圓應尊者)라는 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국사부(國師府)를 설치하고 요속(寮屬) 관원(官員)을 두어 인장(印章)과 법복(法服)을 헌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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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이 1370년 9월 왕사 나옹을 청하여 광명사(廣明寺)에서 선교양종을 모아 공부선절목(功夫選節目)을 고시할 때 천희는 증명법사(證明法師)로 참석하였으며, 선과법회(選科法會)가 끝난 이후 경천사(敬天寺)에 주석하였다. 이후 천희는 개경을 떠나 금강산을 순례하였으며, 공민왕이 5월 사신을 보내 개성으로 환도할 것을 청하자 다시 개성으로 돌아왔으나 가을에 공민왕에게 간청하여 치악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372년에는 화엄종 대표 사찰인 부석사(浮石寺)에 주석하면서 전당(殿堂)을 중수하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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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년(庚戌年) 9월 현릉(玄陵)이 왕사(王師) 나옹(懶翁)을 청하여 개성 광명사(廣明寺)에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제산납자(諸山衲子)를 모아 공부선절목(功夫選節目)을 고시할 때 스님을 증명법사(證明法師)로 모셨다. 이 선과법회(選科法會)가 끝난 후 경천사(敬天寺) 에 주석하였다. 다음해인 신해년(辛亥年)에 금강산을 순례하는 중, 5월에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개성으로 돌아오도록 청하였으며, 그 해 가을 스님은 치악산(雉岳山)으로 돌아가려고 간청하였다. 임자년(壬子年)부터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주석(住錫)하면서 전당(殿堂)을 일신 중수하여 완전히 복구하였으니, 대개 이는 스님이 입적(入寂)하기 전에 화엄종(華嚴宗) 총본산인 부석사를 완전히 복구하겠다는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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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입적

그리고 천희는 1382년 고려 멸망 직전인 6월 16일 창성사(彰聖社)에서 세수 76세, 법랍 63세로 입적하였다. 이에 우왕이 시호(諡號)를 진각국사(眞覺國師), 탑호(塔號)를 대각원조탑(大覺圓照塔)이라 내렸으며, 우왕이색(李穡)에게 명하여 비문을 찬하게 하자 문인(門人)들이 스님의 행장(行狀)을 적어 올렸다. 비문이 완성된 1386년 이색(李穡)이 비문을 완성하자, 1월에 문인(門人) 개태사(開泰寺) 주지(住持) 묘지무애(妙智無碍) 통조대사(通照大師) 충술(冲述) 등이 탑비(塔碑)를 건립하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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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15년 여름 6월 16일 화엄종(華嚴宗) 부석국사(浮石國師)께서 창성사(彰聖社)에서 입적하였다. (결락) 스님의 위업(偉業)을 영원히 썩지 않게 하기 위하여 판종(判宗) (결락) 에게 주달(奏達)하였다. 부고를 받은 우왕(禑王)께서 시호를 진각국사(眞覺國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대각원조탑(大覺圓照塔)이라 내리고는, 신(臣) 이색(李穡)에게 명(命)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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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104쪽.
  2.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104쪽.
  3.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104쪽.
  4.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104쪽.
  5.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104쪽.
  6.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104-105쪽.
  7. 105쪽
  8. 105쪽

참고문헌

  • 김상현, 「眞覺國師 千熙의 佛敎史的 位相」,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57-66쪽.
  • 최연식, 「眞覺國師 千熙의 生涯와 思想」,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67-90쪽.
  •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91-116쪽.
  • 박상국, 천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지관, "수원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488-505쪽.
  •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