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유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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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12일 (토) 12: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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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유점사
(高城 楡岾寺)
대표명칭 고성 유점사
한자표기 高城 楡岾寺
이칭 유점사, 금강산 유점사
유형 유적
시대 고대/삼국
관련인물 유정
관련장소 금강산


정의

강원도 고성군 서면 백천교리 금강산(金剛山)에 있었던 절.

내용

고성 유점사고성 신계사, 고성 장안사, 고성 정양사 등 금강산 4대 사찰 중에서도 가장 크고 웅장한 사찰이었으며, 금강산의 모든 사찰을 관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전국 31본산 중의 하나였다. 경내에 느릅나무가 많아 '楡(느릅나무 유)岾寺'가 되었다고 한다.




유점사는 외금강 효운동 계곡에 세운


신라 초기 남해왕 때 창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건하였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1408년(태종 8) 효령대군이 금 2만냥을 들여 3,000여 칸으로 중건하였다.



신라시대 창건됐으며 조선시대 세조가 이곳에 들렀다가 중건을 명하여 거찰이 됐다.

조선조 왜구가 금강산을 쳐들어 왔을 때 사명대사가 유점사에서 왜장을 만나 글로 회유를 하자 그의 법력에 위기를 느낀 왜구들이 다시는 금강산 경내에 침범하지 않겠다고 한 일화로 유명하다.

고려 때의 오십삼불(五十三佛) 창건설화가 전해 내려오며 지금의 고성항(장전항)에서 유점사에 이르는 계곡과 지명은 모두 이 오십삼불 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점사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유점사", 『시사상식사전』online, pmg 지식엔진연구소. 온라인 참조: "유점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사지(寺誌)에 따르면 원래 이 절은 서기 4년(유리왕 23)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53불(佛)의 연기(緣起)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민지(閔漬)의 기문(記文)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사람들은 생전에 부처님을 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다가,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서 금을 모아 53구의 불상을 조성한 뒤 이를 배에 태우고 바다에 띄우면서 유연국토(有緣國土)에 갈 것을 발원하였다. 이 배는 신룡(神龍)에 의하여 바다를 항해하다가 월지국(月支國)에 닿았는데, 왕이 이 불상들을 공경하여 전당을 짓고 봉안하였으나 원인 모를 불이 나서 전각이 타버렸다. 왕이 다시 전당을 짓고자 하였으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이곳을 떠날 것이니 수고하지 말라.” 하고 만류하므로 이 53불을 다시 배에 태워 바다에 띄웠다. 이 배는 900년 동안 여러 나라를 떠다니다가 신라의 안창현(安昌縣) 포구에 닿았다. 현관(縣官) 노춘(盧椿)이 나가 보니 불상들은 없고 바닷가의 나뭇잎이 모두 금강산을 향하여 뻗어 있었다. 이에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는데, 흰 개가 나타나서 앞장을 서서 따라갔더니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 못가에 53불이 있었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찾아가서 그 땅에 절을 짓고 유점사라 하였다. 광복 전까지 53불 중 3불이 없어지고 50불이 남아 있었다. 창건 이후 1168년(의종 22)에는 자순(資順)과 혜쌍(慧雙)이 왕실의 시주로 당우 500여 칸을 중건하였고, 1213년(강종 2)에는 강종이 백은(白銀) 1,000냥을 대선사 익장(益藏)에게 보내어 중수하도록 하였으며, 1284년(충렬왕 10)에는 행전(行田)이 시주를 얻어서 공사를 착수하였는데 1295년에 중건을 완료하였다. 1408년(태종 8)에는 효령 대군이 태종에게 아뢰어 백금 2만 냥을 얻어서 건물 3,000칸을 중건하였고, 1453년(단종 1)에는 신의(信義)·성료(性了) 등이 중건하였으며, 1595년 (선조 28) 유정(惟政)이 인목대비가 하사한 내탕금(內帑金)으로 중건하였다. 1636년(인조 14) 화재로 소실된 뒤 곧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에는 백금 2,000냥으로 중창하였으며, 1759년(영조 35) 불에 타자 북한치영(北漢緇營)의 승병대장 보감(寶鑑)이 와서 10년의 공사 끝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당우는 53불을 안치한 능인전(能仁殿)을 비롯하여 수월당(水月堂)·연화사(蓮華社)·제일선원(第一禪院)·반룡당(盤龍堂)·의화당(義化堂)·서래각(西來閣) 등 6전(殿) 3당(堂) 3루(樓)가 있다. 이들은 1882년(고종 19)의 대화재 뒤 우은(愚隱)이 중창하였고, 근대의 대선사 대운(大雲)이 중수한 것이다. 이 중 절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은 연화사인데, 이곳은 만일회(萬日會)를 열던 법회장소였다고 한다. 31본산 시대에 이 절은 산내·산외 말사 60개의 절을 관장하였던 금강산 제일의 가람이었다. 이 밖에 중요문화재로는 『보살계첩 菩薩戒牒』과 「보문품」이 있다. 나옹화상이 스승인 지공(指空)에게서 받은 『보살계첩』은 가로 약 7㎝, 세로 약 10㎝ 크기의 감색 장지에 금니(金泥)로 쓴 것을 책으로 묶은 귀중한 문화재이다. 이 계문의 말미에 있는 ‘지공’이라는 수결과 산스크리트 게송(偈頌) 등은 모두 지공의 친필이어서 귀중한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인목왕후가 친필로 쓴 은자 「보문품」은 왕후가 서궁(西宮)에 유폐당하고 영창대군이 참변을 당하였을 때 슬하에 남은 외동딸을 위해서 불보살의 보호를 받으려는 간곡한 정성으로 「관세음보살보문품 觀世音菩薩普門品」을 필사한 것이다.

    • "유점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당시 이 절에는 우리나라 중세 건물 중에서 가장 높고 화려한 건물로 꼽혔으며 53불을 안치한 능인전(能仁殿), 수월당, 연화사, 제일선원, 반룡당(盤龍堂), 의화당(義化堂), 서래각(西來閣) 등 6전 3당 3루가 있었다.

또 창건설화를 간직한 53불상, 패엽경, 나옹 혜근이 스승인 지공(指空)으로부터 받은 «보살계첩(菩薩戒牒)»과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쓴 «보문품», 신라 남해왕이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향로와 비취옥배, 나옹선사의 가사 장삼 등 수많은 보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절에는 까마귀가 쪼는 곳을 팠더니 샘물이 솟았다는 창건 설화가 전하는데, 이 전설을 증명하듯 실제로 유점사에는 오탁수(烏啄水)라는 샘물이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지금은 조선 세조 때 조성된 13층 석탑과 묘향산 보현사로 옮긴 동종(銅鐘)이 보존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이 이곳에서 승병을 지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점사 [楡岾寺] (두산백과)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조헌 금산 칠백의총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영규 금산 칠백의총 A는 B와 관련이 있다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금산 칠백의총 A는 B와 인접해 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대한뉴스 제 1101호-박정희 대통령, 칠백의총 시찰(게시일: 2016년 12월 8일)

  • 대한뉴스 제 1257호-칠백의총 순의 제향(게시일: 2016년 12월 8일)

  • [반만년의 역경을 이겨낸 한민족의 역사 현장]금산 칠백의총 (사적 제105호)(게시일: 2016년 2월 12일)

주석

  1. "유점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3월 31일)
  3.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3월 31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