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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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1일 (화) 05:3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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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
대표명칭 윤선도



정의

내용

윤선도의 생애

  • 출생 및 성장

고산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8세에 관찰공 유기(惟幾)의 양자가 되어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입적되었다. 해남 윤씨는 호남에서 몇 안되는 동인(東人) 가문이었는데 당시 정계청(鄭介淸) 옥사 사건으로 인해 그의 조부인 윤의중(尹毅中)이 휘말리게 되었고 이후 동인이 남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윤선도가 진사시에 합격한 1612년(광해군 4)은 정치적 열세에 몰린 남인들이 왕권 강화와 북인(北人), 서인(西人)의 타도를 주장하며 복권을 시도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이후 윤선도가 수없이 많은 유배를 겪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1]

  • 활동

윤선도가 처음으로 정치 현실에 뛰어든 것은 광해군 시절 권신이던 이이첨의 전횡에 대해 비판적 상소를 올린 일에서 시작되었다. 1616년(광해군 8), 한갓 유생에 불과했던 서른 살의 윤선도가 당대의 권신이었던 이이참의 전횡을 탄핵한 「병진소(丙辰疏)」는 이후 고산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예 관료로 정계에 갓 입문한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선인물과 직접적으로 대결한 이 사건은 당시에 큰 반항을 일으켰다. 고산의 강직한 성품과 투철한 사대부 의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임에는 틀림 없지만 이때문에 윤선도는 이이참과 그 세력들에 의해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는데 이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겪은 수많은 유배 경험의 시발점이 되었다. [2] 또한 이 사건은 인조반정 이후 고산이 서인 정권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과 동시에 서인들로부터 배척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가 「병진소(丙辰疏)」에서 언급한 김제남 역모 사건이 서인들이 상당한 희생을 치루는 계기를 제공하는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윤선도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1623년 인조 반정 이후였다. 그러나 서인 중심의 정계에서 재제외어 출사의 기회를 잡지 못했고, 서인들의 견제로 인해 의금부 도사에 제수받자 이에 불만을 품고 해남으로 이향하였다. [3]
윤선도는 1628년(인조 6) 42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여 다시 정계로 진출하였다. 그는 당시 이조판서였던 계곡 장유(谿谷 張維)의 도움을 받아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로 제수되고 이후 공조좌랑, 하성부 서윤, 시강원 문학 등의 요직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1634년(인조 12) 정적들의 견제에 의해 성산 현감(星山 縣監)으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다시 퇴관하여 해남으로 물러났다. [4]

  • 보길도 입향

윤선도는 호란이 발발한 후 가솔들을 이끌고 강화도로올라가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도로 배를 돌린다. 이 일로 인해 윤선도는 '남한산성에서 왕을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不奔問)'는 죄목으로 1638년 영덕으로 유배를 가는 등 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를 견제할 수 있는 명분을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떄 제주도로 향하던 도중 잠시 들렸던 보길도에 매료되어 보길도로의 입향 및 은거를 결심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삶의 전환정이 되었다. [5]

  • 성품

윤선도는 1649년 다시 복관된 이후로 끊임없는 정쟁으로 인한 복관과 삭탈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인재를 등용하기를 청원하는 「시무팔조소(陳時務八條疏)」와 당시 실력자인 원두표를 탄핵하는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등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병진소(丙辰疏)」와 더불어 그의 강직하고 원칙주의적인 성품을 잘 나타내고 있다. [6]

  • 예송논쟁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고산은 73세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어 효종의 산릉을 간심(看審)하는 데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추천한 수원(水原)이 채택되었다가 취소되고 건원릉(健元陵) 안 건좌(乾坐) 언덕이 채택되면서 파직당한 것은 본격적인 예송 논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로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고산은 남인으로서 삼년설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를 올려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한다. 이 논쟁에서 패한 그는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광양(光陽)으로 이배되는 등 약 8년간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 삼수의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예설(禮說)」 두 편을 지어 복제 문제를 소상히 밝히고 있는데, 이를 통해 끝내 타협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다시금 엿볼 수 있다. 1667년(현종8) 8월 해남으로 돌아온 고산은 9월에 다시 부용동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5년여간 유유자적하면서 보내다가 1671년에 85세로 별세한다. 이처럼 고산의 일생은 청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임병양란의 사회적 혼란과 사색당파의 어지러운 정치 현실 속에서 파란만장한 부침을 거듭하였다.[7]

고산의 문학적 특징

  • 이분법적 세계 인식과 현실 지향 의지

고산의 한시를 일별해 보면, 그가 강호(江湖)와 세속(世俗)을 양분하여 배타적인 구도로 인식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조선 전기의 사대부 문학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것으로, 그의 한시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도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외형적으로는 유사하더라도 시대적 정황과 개인의 현실적 처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산의 경우 강호의 생활이 현실과 단절된 모습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긴장을 끊임없이 지속한다는 점이다.[8]

  • 자연친화적 태도와 심미적 몰입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산에게 강호의 생활은 타의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었다. 하지만 격동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부침을 거듭하던 고산의 일생은 오히려 강호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흥취를 얻고 향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얻은 심미적 체험은 그에게 시작품을 통해 자연 경물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창작 동기와 여건을 아울러 얻게 해 주었다. 따라서 사물의 다양한 모습은 그의 시에서 중요한 주제가 된다.[9]

  • 일상적 사물에의 성찰과 삶의 관조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감동을 느끼고 그것을 시로 형상화하는 것은 시 창작의 기본 원리이다. 한시에서 계절의 순환, 사물의 생동(生動) 등이 많이 다루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성리학을 학습하고 삶의 이법과 지표로 받아들였던 당대에서는 누구에게나 통용될 만한 일반적인 명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물(觀物)의 자세는 이론적으로는 서로 유사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개인이 서 있는 시대와 처지에 따라 그 주목하는 바가 상이하게 나타난다. 고산도 많은 시작(詩作)에서 다양한 경물을 제재로 하여 형상화하였다. 다만 고산의 경우는 사물의 본래적 의미에서 화석화되고 관념화된 경물, 예컨대 흔히 사군자(四君子)로 일컬어지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이나 ‘연비어약(鳶飛魚躍)’과 ‘운영천광(雲影天光)’ 등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주위에 함께 공존하는 세계 속의 지극히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사물들이다.[10]

  • 산문의 내용과 특성

현전하는 고산의 산문 작품은 운문 작품과는 달리 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도 문학적이라기보다는 현실 참여적인 데에 초점을 둔 실용문이다. 그렇지만 고산의 명성이 널리 알려진 것은 운문이 아니라 바로 이 산문 때문이다. 실제로 고산의 문장은 수준이나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기록에서도 ‘능문(能文)’으로 인정될 만큼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11]

주석

  1.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2.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3.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4.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5.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6.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7.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8.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9.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10.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11.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고미숙, 「미리 보는 <한겨레 고전 인물 평전 100> : 윤선도 평전; 고산 윤선도_정치와 미학은 어떻게 조우하는가?」, 『연보와 평전』 vol.2, 부산대학교 점필자연구소, 2009
    • 문영오, 「고산 윤선도의 한시 연구」, 『한국문학연구』vol.5,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1982
  • 단행본
    • 고미숙, 』윤선도 평전 : 정쟁의 격랑 속에서 강호미학을 꽃피운 조선의 풍류객』, 한겨례, 2013
    • 정명래, 『어부사시사 : 낚시꾼이 풀어쓴 孤山 尹善道』, 샘물,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