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동 별서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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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4월 23일 (일) 17:49 판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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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별서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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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백운동 별서정원
유형 정원


정의

백운동 별서정원담양소쇄원, 보길도세연정과 더불어, 호남 3대 정원으로 불린다.

설명

강진군에서 2008년부터 백운동 별서정원의 복원 계획을 세웠다. 별서정원의 여러 공간은 남아 있던 유구와 옛 기록에 근거하여 복원 완료되었다. 현재 한국전쟁 이후에 다시지어 살림집으로 쓰던 낡은 본채를 헐고 중건하는 일과 화단의 식재, 주변 공간의 정리 및 진입로 정비만 남겨둔 상태다.


백운동 별서정원은 월출산 옥판봉 남쪽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안운마을에 자리잡은 전통 정원이다.

이곳은 입산조인 이담로가 중년에 조성하여 만년에 둘째 손자 이언길을 데리고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12대에 걸쳐 이어져온 유서 깊은 생활공간이다. 백운동 5대 주인 이시헌이 엮어 정리한 백운세수첩에 역대 명류들이 백운동 8영을 읊은 연작시가 다수 실려 있다. 이들 시는 초기 백운동의 모습을 재구성하는 데 큰 밑 바탕이 된다. 이밖에도 백운세수첩에는 이담로가 백운동을 묘사한 글과 적와기수 신명규가 쓴 백운동초당 8영....

다산 정약용은 이곳을 직접 방문해 백운동 12경시 연작을 지었다. 또 이때 제자 초의에게 백운동도와 다산도를 그리게 한 뒤 자신의 친필 시를 합첩한 백운첩을 남겼다. 이를 이어 다산의 제자 황상과 이시헌이 스승의 시에 화운해서... 초의와 소치 허련 등도 이곳을 찾아 시를 남겼다.



역대 백운동주 가운데 뚜렷한 행적을 남긴 사람은 많지 않다. 입산조 이담로와 그의 손자 이언길은 백운동 별서를 처음 경영하였고 오늘의 모습으로 일군 주역이다. 이담로의 아들 이태래는 백운동에 들어와 산 적이 없다. 이담로를 따라 들어온 손자 이언길이 조부의 유언에 따라 제2대 백운동 별서의 주인이 되었다. 이언길은 84세의 장수를 누리면서 이 공간을 평생에 걸쳐 정성을 쏟아 가꾸었다. 이담로 시대에 별서였던 이곳은 이언길의 만년인 1756년 이후 온 가족이 이거하면서 생활 주거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현재 백운동 별서정원은 11대 동주인 이승현에 이르기까지 13대째 직계의 후손으로만 한 줄기로 대를 이어 지켜왔다.


백운동 별서정원은 이 백운첩을 바탕으로 복원된 것이다.

백운첩이 여기서 제작됨 1812년


그가 저술한 『백운세수첩(白雲世守帖)』에는 역대 명류들이 백운동 8영을 읊은 연작시가 다수 실려 있 이들 시는 초기 백운동의 모습을 재구성하는데 큰 밑바탕이 됨),

시간일람 등의 자료를 정리해서 펴냈음. 다산이 백운동에 보낸 편지 세 통은 시간일람에 실려있음.

이시헌의 문집 <자이집>에는 백운동의 14경을 노래한 시를 비롯해 이곳에서의 일상이 오롯하게 기록됨



설록차로 유명한 아모레퍼시픽에서 가꾸고 있는 4개의 차 재배지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곳으로 면적이 33㏊에 달하는데 단일 다원으로는 제주 서광다원 다음가는 규모이다.[1]

시각자료

360 VR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설록다원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이시헌 백운동 별서정원 A는 B의 주인이었다
설록다원강진 정약용 A는 B와 관련이 있다
설록다원강진 아모레퍼시픽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4.7419353 126.6975985 백운동 별서정원은 백운동 별서정원과 관련이 있다
34.7406953 126.7047464 설록다원강진은 백운동 별서정원과 관련이 있다

참고문헌

  • 정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글항아리, 2015.

주석

  1. 최정규 외 3인,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설록차 강진다원",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