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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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륜이 황해도 소래에 세운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스코틀랜드선교사 로스(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선교에 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1874년 의주사람 이응찬을 만나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자, 그의 친구인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등이 고려문에서 만나 최초로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 중 이응찬은 로스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로 일을 하면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 서상륜 한편 서상륜(徐相崙 1849~1925)은 양반가문의 장남으로 한문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친을 따라 한문공부에 능할 뿐 아니라 중국어에도 능숙하였다. 그래서 고려문을 넘나들며 홍삼 장사를 하던 중 뜻하지 않게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때 이미 기독교를 접한 이응찬이 그를 매킨타이어에게 안내하였다. 전염병으로 사경을 헤매던 서상륜은 헌터 의사의 치료를 받고 병이 낫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심양으로 이동하여 로스 선교사의 성서번역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대동강 변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이후 더욱 쇄국정책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머지않아 조선에도 선교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을 믿고, 성경번역사업을 위하여 조선청년들에게 투자하면서 성서번역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마침내 로스선교사는 서상륜의 도움으로 1882년 최초로 『로스역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중국 땅 심양에서 한글성경을 발간하였다. 이는 한문에 조예가 깊은 서상륜의 결정적인 역할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고 하는 점에서 로스와 서상륜의 공동번역이라고도 말한다.

그렇게 성경을 번역한 서상륜은 또 하나의 사명을 안고 그가 번역한 누가복음을 안고 압록강을 건너 고향 의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도중에 압록강 국경 관리들에게 적발되었다. 그 당시는 성서 반입이 철저하게 금지되었으나 고향 친구의 도움으로 10권을 챙겨 고향에 오게 되었다. 그는 고향에서 전도에 위기를 느끼면서 동생 서경조와 함께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의 소래(송천松泉)로 피신하였다. 그는 자기의 가슴 품속에 몰래 숨겨온 성경을 가지고 외가 친척과 인근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전도가 점차 활기를 띠면서 가정집 예배처소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로써 1883년 한국 최초로 외부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소래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1885년 4월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최초 선교사로 입국하면서 조선 땅에도 본격적인 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는데 소래교회는 그 이전에 이미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소래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도 언더우드 선교사가 건축자금을 미국에 가서 모금하여 지원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상륜을 비롯한 소래교회 교인들은 “우리가 우리 예배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아서 하는 것은 본의에도 어긋나며, 후세에 전하는데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정중히 거절하였다. 언더우드는 그 뜻을 존중하면서 서양의 램프등 5개를 교회에 기증하였는데 그 불빛이 얼마나 밝고 환했는지 온 동리를 환하게 밝혔다고 한다. 이렇듯 소래교회는 한국최초의 예배당인 동시에 외국의 원조 없이 자생적으로 세운교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큰 것이다.

한편 1887년 9월27일 언더우드에 의하여 서울에 설립된 최초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창립될 때 참여한 14명은 서상륜이 전도한 소래교인들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 서상륜을 새문안교회의 조사로 세워지면서 피차 동역자가 되어 선교초기 권서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사역에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서상륜은 1925년 12월16일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장례는 장로교총회장으로 치러졌고 장지는 장연군 대탄리에 안치되었다. 그의 동생 서경조는 한국교회최초목사7인 중 한 명이다. 그의 자녀 독립운동가 서병호는 상해에서 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후손으로 서원석(대한성서공회) 서경석(목사) 등이 있다.

후일 언더우드가,‘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추수하러 왔다’고 말한 데서 서상륜의 교회사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목숨을 담보로 이루어진 헌신, 서상륜의 순교자적인 삶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다. 서상륜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입국 이전, 이 땅에 이루어진 사도행전이다. 그의 높은 뜻을 기리는 한국기독교선구자 서상륜과 이수정의 기념비가 용인시 총신대 신대원에 복원된 소래교회 뜰 안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1848(헌종 14)∼1926. 기독교 신자.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내용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13세 때 부모를 잃고 만주에서 홍삼장사를 하였다. 31세 때 만주에서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맬 때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목사인 매킨타이어(McIntyre, J., 馬勒泰)에게 구호를 받은 후 완쾌되어 신자가 되었다.

몇 달 후에 매킨타이어와 같은 선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목사 로스(Ross, J., 羅約翰)를 만나서 세례를 받고 그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그 뒤에 이성하(李成夏)·이응찬(李應贊)·백홍준(白鴻俊)과 함께 신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1882년 가을 쪽 복음 형태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간행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의 일로, 민족교회 성립의 기초를 이룬 것이었다.

1884년에는 『예수셩교젼셔 마태복음』과 『말코복음』을 심양(瀋陽)의 문광서원에서 간행하였고, 1887년 이른바 ‘로스 번역 성서(Ross Version)’라고 하는 신약성서 번역본을 『예수셩교젼셔』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다.

이는 중국어 성경에서 번역한 것으로 성서 번역뿐 아니라 식자와 인쇄도 모두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성서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에 반포하는 것도 시도하였다.

1883년 성서를 가지고 입국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의주(義州)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때. 의주부 집사이며 교인이었던 김효순(金孝順)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고향인 의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상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동생 서경조(徐景祚)와 함께 황해도 장연군솔내(松川) 마을로 이주, 교회를 세우고 전도활동을 하여 한국 개신교회의 요람지로 발전시켰다. 1887년 서울 새문안교회가 설립될 때 설립교인 14명 중 13명이 그의 전도로 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말년에는 솔내 교회에서 전도활동에 전념하였다. 1936년 9월 제25회 장로회 총회에서 기념비 건립이 결정되어 1938년 그의 묘지에 기념비가 세워짐으로써 선구자적 선교 사업을 기리게 되었다.


『한국개신교사(韓國改新敎史)』(백낙준,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상』(차재명 편, 신문로교회당, 1928)

최초 한글성경 번역한 서상륜(徐相崙)

서상륜이 황해도 소래에 세운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한국기독교선구자 서상륜 기념비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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