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진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
조선 후기 경상도 대구 도호부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진보(進甫), 호는 이재(怡齋). 증조할아버지는 예빈시 직장(禮賓寺 直長)을 지낸 서필(徐弼), 증조할머니는 숙부인 대구 배씨(大邱裵氏)이며, 할아버지는 서응기(徐應基), 할머니는 찰방(察訪)을 지낸 박사림(朴士林)의 딸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함(徐涵), 어머니는 부장(部長)을 지낸 하한수(河漢壽)의 딸 숙부인(淑夫人) 진양 하씨(晉陽河氏)이다. 부인은 충순위(忠順衛) 민림(閔霖)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서사진의 후손 중 일부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신당리와 대구광역시 하빈면 무등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서사진(徐思進)[1568~1645]은 1568년[선조 1] 대구 도호부 산격동(山格洞)[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서 출생하였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역의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대구 도호부에는 읍내와 3개 속현에서 의병이 조직되었는데, 서사진은 읍내 6개리 중 북산리(北山里) 유사(有司)를 맡았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
서사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용담재(龍潭齋)가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위치해 있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용담재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1134-1번지에 있는 재실.
용담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효종 1년(1605)경에 세운 것이다. 현재의 건물 대지는 그 당시 서사진이 강학소를 만들어 교육에 전념하던 곳이라 한다.
상량문에 보이는 ‘숭정기원후오무자(崇禎紀元後五戊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고종 25년(1888)에 중수한 연대를 가리킨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터를 매각하고 1976년 1km쯤 떨어진 북쪽 종중산에 그대로 옯긴 것이다. 웃면을 모르타르로 마감한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건물 전면에는 원주를, 나머지는 모두 네모 기둥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맨좌측에 2칸의 우물마루 대청을 두고 그 우측에 2칸통의 온돌방을 두었다. 이 온돌방의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설치하였다. 상부가구는 대들보 위에 놓인 제형판대공이 마루 도리를 받는 3량가로, 장혀와 상인방 사이에는 소로로 수장하였다. 용담재는 전체적으로 부재가 견실할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도 대체로 양호한 조선후기 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