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식(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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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의 의병장. 지사.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청지(淸之), 호는 명암(銘巖). 아버지는 봉사(奉事) 서충립(徐忠立) 양자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서씨일가연합회 [[1]] [[2]]

가족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徐文翰 현감)
                      • 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증조할아버지 : 서맹원(徐孟源 충순위)
                          • 할아버지 : 서필(徐弼 예빈시 직장)
                            • 아버지 : 서응기(徐應期 생원)
                              • 형 : 서형(徐泂 진사)
                                • 조카(양자.서흡의 자): 서사원(徐思遠 학자)
                                • 형 :서흡(徐洽 전교)
                                • 본인 : 서식(徐湜 의병장)
                                • 동생 : 서함(徐涵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 조카: 서사건(徐思建 증 장악원 정(贈 掌樂院正)
                                    • 손조카: 서변(徐忭 학자)
                      • 작은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작은증조할아버지: 서지원(徐智元 학자)

생애 및 활동사항

8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상을 치르는데 가례(家禮)를 준수해서 사람들이 어른으로 대접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어머니를 모시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위독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주자 어머니가 소생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병으로 나서지 못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운봉현감(雲峯縣監) 남간(南侃)을 찾아가 의병활동을 주장하자 남간이 공을 의병장으로 삼았다. 공이 이에 격문을 돌리고 의병 수천명을 모아 황산(荒山)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벼슬을 주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또다시 천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연속되는 국난으로 고을의 풍기가 문란해지자 마을의 뜻있는 노인들과 향약 7조를 제정하고 사재를 털어서 향토부흥에 헌신하였다.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과 엄계서원(嚴溪書院)에 제향되었다.